얼마 전에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했다. 키, 몸무게 등을 재는 신체검사말고. 이 나이 되도록 건강검진받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전 업무 작파하고 건강 기록표 한장씩 든 채 엑스레이 찍어주는 차 앞에 늘어선 동료들의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하긴 마다할 놈이 누가 있겠나. 일 않고 시간 보내고, 거기다 건강검진받게 해주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뿌듯함까지 덧붙여졌을 테니.
안정이란 것이 얼마나 덧없고 어이없는 것인지를 우리는 지난 5, 6년 사이에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몇년 전에 무슨 은행 없어질 때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은행원들 모습도 생각난다. 요새야 은행원들이 농성하는 일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참 낯설었다. 데모하는 놈들 때문에 차 막힌다고 구시렁거리던 사람들이 평생 가볼 일 없을 거 같았던 명동성당에 앉아서 농성을 하자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안정된 직장이라는 게 끝장난 지 오래건만 아직도 그것에 매달려 자기는 정식이고 다른 이는 계약이라며 흐뭇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정식이래봐야 정확하게 말하면 일년짜리 계약직이고 때가 되면 다 잘려나가는 건데.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해주는 건 직원들의 건강이 염려스러워서이다. 몸이 튼튼해야 회사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으니까 건강에 신경을 쓰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몸만 멀쩡하면 뭐 하나. 사실 몸만 멀쩡하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정신이 멀쩡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정신이 멀쩡하려면 하루에 몇 순간은 제 마음대로 제정신을 추스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직장인은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간다 해도 시간은 후딱 지나가고 다음날 아침 다시 또 집을 나서야 한다. 제정신을 차릴 틈이 없으니 자기 개발할 여유도 없다. 가끔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그런 거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얼마 못 가 다 소모될 능력을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채워넣기가 무섭게 시도 때도 없이 빨린다.
아인슈타인은 특허국 다니면서도 퇴근한 다음에 연구를 열심히 해서 결국에는 노벨상을 받았다. 이건 아인슈타인이 천재라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한가했다. 세계가 시계를 바삐 돌리기 시작한 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체제와 조직은 사람들을 숨돌릴 틈없이 몰아세우고, 똥침을 찌르면서 재촉하고 더 빨리, 더 멀리를 온몸에 새겨놓았다. 이렇게 한가하지 못하다 보니 몸은 멀쩡해도 정신은 딴 곳에 가 있다. 몸은 딴딴한데 정신은 흐물흐물해졌다. 몸은 건강관리센터에서 관리해주고, 정신은 체제와 조직에서 보관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과가 이것이다. 몸도 정신도, 시간까지도 알아서 챙겨주는 것.
건강검진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럽다. 이게 무슨 뜻일까? 아직은 직장에서 뽑아먹을 뭔가가 남아 있는 몸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고지혈증이 있으나 운동하면 된다는 말도 들었다. 고질혈증. 흔하고 뻔한 질병이다. 술 집어넣고 담배먹으며 살아온 몸뚱어리에 이거 없는 40대 직장인은 사회생활 대충 한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정말 건강한 걸까? 저 데이터들을 믿어도 되는 걸까? 정말로 죽음에서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숫자는 정확하게 나왔고, 처방도 신뢰할 만하게 나왔는데 자꾸만 이런저런 의심들이 솟아 올라온다.
따지고 보면 사는 건 순간이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음이다. 내쉰 숨을 다시 들이켜지 못하면 그것은 죽음이다. 몸이라는 덩어리가 숨이라는 아주 간단한 것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의식할 틈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죽음에 신경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음은 산업적으로 처리되고, 깔끔하게 현장에서 지워진다. 상여가 온 마을을 돌면서 너희들도 언젠가는 이거 올라탄다고, 꼬마부터 어른들까지 일러주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청룡열차를 탄 것처럼 단숨에 그런 세상으로 와버린 것이다.
건강검진 뒤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건강이라는 것은 우리를 속이는 허위의식,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운동하는 시간을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살아 있는 이유를 생각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입술을 앙 다물고 코로 숨을 들이켜고 숨을 내쉰다. 기어이 악착같이 숨을 쉬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야겠다. 그때까진 숨쉬고 있다 해서 살아 있는 게 아닐 테지만.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