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불편하거나 불쾌하다면, 감독이 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든 거다. 인공적인 장치를 거둔 영상 실험 선언 도그마를 주창하고, 페미니스트들의 타깃이 되곤 하는 여성의 수난사를 즐겨 다루는 라스 폰 트리에의 목표는 언제나 ‘도발’이니까. 신파 뮤지컬 <어둠 속의 댄서>에 이은 신작 <도그빌>은 더 나아가 영화에 대한 도발이며, 미국과 휴머니티에 대한 도발이다. 낯설고 신랄하고, 그리하여 불편하면서도 경이로운 작품.
공황기의 미국, 로키산맥 부근의 작고 조용한 마을 도그빌에 날개 잃은 천사처럼 가련하고 신비로운 여인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찾아든다. 갱단에 쫓기는 자신을 숨겨달라는 호소를, 마을 청년 톰(폴 베타니)은 물리치지 못한다. 망설이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그레이스를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마을로 날아든 그레이스의 수배 전단은 모든 걸 바꿔 놓는다. 친절하고 다정하던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학대와 착취에 지친 그레이스의 탈출 기도는 좌절되고, 그레이스의 마지막 선의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뒤바뀐다.
<도그빌>을 보는 것은 연극을 보면서 동시에 소설을 읽는, 기이한 체험이다. 분필로 구획을 그린 마을, 최소한의 장식도 배제한 평면적인 세트에서, 배우들은 없는 문을 여닫고 없는 음식을 맛보며 소꿉장난하듯 연기해 보인다. 여러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영화는 선이 악으로, 천국이 지옥으로 돌변하는 과정을,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동화처럼 신화처럼 선보인다. 브레히트의 희곡과 70년대 셰익스피어 왕립극단의 TV 작품이 <도그빌>의 원천. 미국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도그빌>은 작품 속 ‘타인의 희생과 역습’구도가 9·11을 빼닮아, 올 칸영화제에서 ‘반미영화’로 회자되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박은영
라스 폰 트리에의 영상실험은 계속된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한 연극적 공간에서 배우들은 천국과 지옥을 생생히 그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