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객석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아들을 잃고 극장에서 흐느끼던 알모도바르의 전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마뉴엘라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런 시작은 익숙하다. 무대는 현실을 닮아 있고 현실은 무대처럼 극적이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인터미션삼아 엮여 있었다면, <그녀에게>는 고통과 회환을 담은 피나 바우시의 퍼포먼스를 서막과 피날레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둘러놓는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마르코다. 마르코는 투우사 리디아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투우경기 중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간호사 베니그노는 아름다운 무용수 알리시아를 흠모하지만 알리시아 역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몇달 뒤 이 두 남자는 극장에 이어 병원에서 다시 만난다. 알리시아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으며 지난 4년 동안 그녀를 정성껏 씻고 문지르고 이야기를 건네는 베니그노. 마르코는 처음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점점 베니그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전염되어간다.
‘그녀’들의 왁자지껄한 수다가 아니라 ‘그’의 고해성사 같은 속삭임을 따라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그녀에게>는 리디아가 투우복을 갈아입는 과정과 알리시아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히는 과정을 마치 종교의식 치르듯 성스럽게 표현한다. 작품마다 여성성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았던 ‘여성의 감독’이 이번엔 ‘그녀들’을 끊임없이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대가없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신격화된 존재로 상승시킨 것이다. 특히 베니그노가 잠든 알리시아의 몸을 닦아주며 이야기해주는 <줄어든 연인>의 결말, 즉 화학약품을 잘못 마신 뒤 몸이 손가락만하게 줄어든 한 남자가 결국엔 자신의 연인의 질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살았다는 순애보는 여성성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숭배를 확연히 보여준다.백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