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테넌바움>을 쓰는 참에 방금 이 영화 O.S.T 앨범의 속지를 읽었다. 음반을 산 지 반년이 더 됐는데 속지를 읽어보는 건 처음이다. 맨 뒷장에 감독인 웨스 앤더슨이 글을 써놓았다. 생각보다 글이 흥미롭다. 실은 썰렁하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나 음악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은 채(마지막 부분에 음악감독의 감상을 한줄로 인용하긴 했다) 오리지널 스코어 작곡가 마크 마더스바우의 사무실 풍경을 주저리주저리 나열했다. 재정을 담당하는 누구는 언제나 사막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이고, 누구는 27살인데 같은 여자랑 두번 결혼하고 두번 이혼했다. 또 누구는 늘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LA타임스>의 경제면을 읽는다 등등…. 그런 글짓거리가 감독으로 세련된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이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얄 테넌바움>을 볼 때와 아주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로얄 테넌바움>은 내가 봤던 가족영화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다. 뿔뿔이 갈라졌던 가족들이 마지막에 화해하기는 하지만 “모든 게 내 잘못이었어. 으흑”하는 감동 스토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가족은 이데올로기고 모든 게 위선이야라는 식의 잘난 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가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로서는 파악이 잘 안 된다. 입양된 누나, 마고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막내 아들 리치에게 아버지 로얄(진 해크먼)이 충고를 하려다 “내 말 귀담아 듣지마라, 마고도, 가족도 모두 불가사의였어”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감독의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시종 웃어야 할지 심각하게 봐야 할지 헷갈릴 만큼 드러날 듯 말 듯한 엇박자로 진행된다. 자살을 기도한 리치에게 형 채스가 “유서도 썼어 봐도 돼 심각한 내용이야” 캐물으니 리치는 “당연하지. 유서잖아” 대답한다. 자식들을 극진히 돌봐온 엄마는 병원 복도에서 화장을 고친다.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들갑을 떨며 병원에 달려갔던 아버지는 환자복 차림으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리치를 보고 “쟤 어디 가는 거야 ” 소 닭 쳐다보듯 반응한다.
한 지붕 아래 사랑은 늘 부족하거나 오버되고 이해는 좀처럼 동반되지 않는다. 그걸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의 화해는 무너진 가족의 복원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꼴을 보고 어찌할 도리없이 측은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더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가 유난히 해피엔딩에 집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좋다. 허영심 강한 로얄은 화려하고 비장한 비석의 문구를 동경한다. 그가 죽은 다음 가족들은 그의 비석에 ‘로얄 테넌바움, 침몰 직전의 전함에서 가족을 구출하려다 비극적으로 전사하다’라는 황당한 문구를 새겨준다. 전쟁시도 아니고 이런 거짓말은 단 한명의 사람도 속일 수 없다. 비석을 새긴 가족들도 이런 짓거리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했으니 그렇게 해준다. 몰이해와 무관심, 과보호로 점철돼 있는 집단, 그럼에도 가족이 가족인 것은 서로의 어리석음을 이렇듯 지켜봐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김은형/ <한겨레>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