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양지를 지향하는 나는 “음울한”, “기괴한”, “모호한” 따위의 말을 싫어한다. 당연히 그런 분위기도 싫다. “아늑한”, “청량한”, “유쾌한” 등의 말로 수식되는 그런 분위기가 좋다. 전에도 밝힌 것처럼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온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트루먼의 동네나 레이스 커튼 달린 집에서 레이스 달린 앞치마를 입고 다정하게 “Honey, I’m Home”을 외치는 남편을 기다리는 ‘플레전트 빌’이다. 그런데, 왜! 왜! 왜! 나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하고 있네’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다. 내 수준 알면서 왜 그러는가. 린치가 작가인지는 모르겠으나 작가주의 영화를 보고 나와서 사람들이 품평을 할 때면 괜히 시계를 보며 황급히 자리를 뜨는 나로서는, 모호하고 난해한 린치 영화에 대한 나의 호감이 모호하고 난해하기만 하다.
내 인생 양지였을 땐 안 그랬다. <광란의 사랑>을 보고 “이 뱀가죽 재킷은 내 자유의 상징이다”라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대사를 흉내내며 낄낄대기는 했지만 감동 수준은 전혀 아니었고 <블루 벨벳>을 보고나서는 “감독, 변태 아니냐”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정말 그때까지는 내 삶도 남부럽지 않게 청량했던 것이다.
내가 데이비드 린치를 좋아하게 된 건 텔레비전 시리즈 <트윈 픽스>를 보면서였다. 92년쯤 매주 토요일 밤 10시에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장면인데 나는 첫 장면부터 완전히 압도돼버렸다. 멀리 떨어지는 폭포수를 어둡게 잡던 카메라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조앤 첸이 권태로운 표정으로 멍하니 창문을 보고 있다. 거기에 깔리는 바달라멘티의 음울하고 불길한(그러나 너무나 멋진!) 테마음악. 뒤로 이어지는 로라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시체와 붉은 커튼 뒤의 거인과 난쟁이, 질식할 것 같은 교외의 풍경. 모든 건 낯설고, 섬뜩했고, 그리고 매혹적이었다. 린치의 영화가 그렇듯 내 열광의 전후좌우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뒤로 가면서 이야기는 좀 황당하기도 하고 튀기도 했지만(전체 시리즈를 여러 감독이 나눠서 연출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당시 심야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에 게스트로 나오던 정성일씨한테) 린치가 직접 연출했다는 1, 2, 3부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중에 영화로 나온 <트윈 픽스: 불이여 나와 함께 걸어라>는 맥빠지는 수준이었다.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다소 잦아들었던 나의 열광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면서 되살아났다. 그리고 조금은 깨달았다. 내 열광의 정체를. 영화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한 장면이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배우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LA에 온 베티가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까지 가는 짧은 순간이었는데 이 평범한 하나의 중간 컷을 린치는 기묘하게 꼬아서 지독하게 낯설고 황량한 풍경으로 만들어놓았다. 분석적으로 그의 작품을 읽을 능력은 없지만 나에게 그의 영화가 매혹적인 건 이런 장면들 때문인 것 같다. 왜 그런 장면들을 좋아하는데 라고 굳이 묻는다면, 글쎄… 아마 내 인생 청량한 시절 다 끝났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할밖에. 김은형/ <한겨레>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