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Report > 씨네스코프
해외신작 <피아니스트>
2002-09-11

화염과 분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폐허 속을 헤매는 남자가 있다. 1939년, 나치의 깃발이 내걸린 폴란드 바르샤바.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져, 다친 짐승처럼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그 남자는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이다. 독일군의 눈을 피해 근근이 목숨을 유지하고 있지만,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뿐이다. 결국 스필만은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다.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한 스필만에게, 장교는 연주를 명한다. 이건 스필만 최후의 연주가 될 터였다. 팽팽하게 내려앉은 공기를 가르는 피아노 선율. 연주가 끝나고, 장교는 코트를 벗어 스필만의 어깨를 덮어준다. 몇년 뒤, 나치가 패하고 상황은 전도된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때 그 장교가 자신을 찾는다는 얘길 들은 스필만은 그를 찾아나서지만, 다시 만나지 못한다.

소재로 보면, <피아니스트>는 또 한편의 홀로코스트영화일 뿐이지만, ‘예술’과 ‘인간’의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가 있는 영화다. 나치와 유대인은 악과 선의 단순한 대립항이 아니라는 사실. 인간은 혈통과 이데올로기로 편을 가르기엔 너무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 실존 인물인 스필만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피아니스트>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나,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나, 그 혹독한 역사를 몸소 겪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폴란드 역사에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로만 폴란스키는 4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 만든 <피아니스트>로 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았다.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