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
결혼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가 있다고 하자. 집 팔고 논 팔아서까지 인공수정을 감행하는 이들은 부부애도 남다르다. 남편은
아내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감추며 스스로에게 결격사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아내는 가임기가 되면 남편의 출장지로 쫓아갈 정도로 자신들의 아이를
희구한다. 그런데 단 하루를 살아도 내 새끼인 자신의 피붙이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에게 막상 그들의 근원적인 혈맥은 보이지 않는다. 맞벌이
부부가 한 20년은 모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은 팬시한 집에서 시댁이라는 명패와 연관된 인간은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얼씬거리지 않는 이상한
부부. <하루>라고 이름붙은 멜로영화 속에는 <편지>나 <약속>부터 이어온 대한민국 신파의 어떤 기조, 슬픔이 넘쳐나는 자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밀어내버린, 공중에 붕 떠버린 한국영화의 어떤 증후가 포착되고 있다. 비단 이는 <하루>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등학생 아들이 나이먹은 선생님을 사랑해서 뉴질랜드까지 죽으러 가는데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부모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납득이 안 갈 정도로 주인공을 방치한다.<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봉수와 원주는 두 사람 모두 부모의 죽음으로 어떤 공통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듯하지만, 어찌됐든 둘의 연애사건은 둘만의 문제일 뿐이다. 11월부터 이어진 최근의 멜로 <불후의 명작> <나도 아내가…>
<하루> <번지점프…> 그리고 최근의 <선물>에 이르기까지 이들 영화의 여자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로 설정돼 있거나 내레이션 속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또한 영화 속 주인공들의 관계 자체도 부부나 연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이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을 넘어서까지 사랑하는 비현실적 남자들이 여전히 흥행의 맹위를 떨친다.
따로 또 따로, 가족은 증발했다
이즈음의 한국영화에서 가족들은 서서히 증발하는 기체 같은 존재이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거기 있지 않았던 것처럼, 대한민국 혈연지상주의는
신세대 부부들이 떠맡기로 한 것처럼, 가족들은 전체 내레이션에서 철저히 제외된다. 그러나 무엇이 결핍인가? 그것은 무엇이 과잉되었는가와
똑같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가족들과 연관된 복잡다단한 시선이 결여된 자리에는 관객의 심장을 겨냥한 죽음이 자폭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의
결이 스며든다. 결국 이들은 철저히 원자화되고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죽음이든 죽음보다 진한 연애든 삶이 주는 각종 사건도 전적으로 둘만의
소유이다. 번잡한 인간관계가 배제된 내레이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하고 주인공들의 농밀한 감정을 드러내는 간편한 때깔을 입지만, 가족
없이 부유하는 한국영화는 죽음이 있되 번지지 않고, 일상이 있되 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쩐지 석연치가 않다. 너무 간편한 방식으로
가족, 특히 아버지들이 지워지고 있으며 너무 전면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존재는 이야기의 출발점부터 거절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가족관계는 사회, 윤리, 경제적인 이데올로기에 유지되는 일종의 권력관계라고 할 것이다. ‘가정은 그대가 그곳에 가야만 할 때,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한 곳이다’라는 프로스트의 낡은 충고 속에는 가족이 “삭막한 세계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단일체로서의 전통적인 가족관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같은 영화가 찬찬히 들여다보듯이, 가족이란 공적 영역과 정치, 경제, 문화, 성별상의
규범이 밀접하게 연관된 ‘따로 또 같은’ 복합체임은 물론이다. 80년대 리얼리즘 세대라고 일컫는 박광수, 장선우 그리고 최근 이들의 계보를
잇는 이창동의 영화만 해도, 가족은 이렇게 다원적인 복합체로서 서로 다른 욕망을 꿈꾸고 한국의 변화되는 물질주의와 광포한 근대성의 균열을
드러내는 진원지에 존재하고 있었다. 폭력적인 남편과 아내를 피해 또한 고달픈 직공으로서 변두리 삶을 위무하는 과정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의
민공례와 배일도는 사랑에 빠져 살림을 차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평화로운 연인의 상태를 희구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살림집을 가차없이
침입한 배일도의 아내로 인해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역시 전라남도의 외딴 섬 자체에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가치들을
집약시킨다. 아기에게 젖을 물린 백치 여자의 모습이 있는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유년기의 조화로움에 대한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가끔 설익은 역사의식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전면화돼 있긴 해도 80, 90년대의 리얼리즘영화들은 가족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의 부박한
비애나 근대적 사회에서 상실되어간 유년기,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조화의 장소로 회귀하고자 하는 울컥 솟는 정서를 감내하고자 했다(<초록물고기>에서
죽어가면서도 형에게 전화를 거는 막동이나 막동이의 죽음을 대가로 음식점을 차린 가족들의 평화로운 한낮을 보라). 더 나아가 <꽃잎>이나
<칠수와 만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영화들에서는 간혹 이념전쟁과 세대전쟁이 맞물리던 당대의 팽팽한 긴장감이 가족을 넘어서 사회의식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죽이고 싶은 아버지도 ‘없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이제 근자의 한국영화에서는 더이상 죽었다고 할 만한 아버지나 죽이고 싶은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다.
남은 것은 새로운 세대의 취향을 승인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로 고민에 빠진 부모들이다. 영화 <눈물>에서처럼 공석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을
내버려두는 아버지가 민주적인 아버지요, 아이들의 노랑머리를 승인하는 것이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는 아버지가 돼버린 것처럼 말이다. 휴대폰의
색깔이 검은 색이냐 빨간 색이냐, 오토바이를 탈 것이냐 차를 살 것이냐가 중요해진 요즈음 세태에서 세대간의 이념전쟁은 이미 소비사회의 물질주의적인
일회적 논리에 흡수·병합되고 있다. 이와 발맞춰 한국영화 속에서 지워진 아버지들은 결국 실제 존재하는 아버지가 아닌 으레 있으나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그런 허상으로서의 아버지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주류사회가 나름의 권위에 대한 합리적 체계의 틀조차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며, 우리가 80년대의 이념전쟁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몇몇이 목숨을 걸고 피를 뿌린 80년대가 채 10년이 넘기도 전에 찾아든 그것이 헛것이었다는 허망감
말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도 혁명은 있었으나, 법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세우기 위한 민주화운동과 근대성의 개념은 곧 탈근대로의 미친 듯한
질주를 감행해야만 했다. 주류사회로 통합되는 이 어질어질한 가속도를 우리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 세대전쟁 자체에 대한 기피가 최초의
출발점에서부터 현실도피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미칠 듯한 소비주의적인 일회성의 운명적인 사랑 논리에 몸을 실은 것이 근자의 한국영화들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동성애나 이혼이나 모성애 이데올로기 같은 복잡다단한 가족과 연관된 문제는 시시각각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으니….또한 한국영화
속 남자들은 <플란다스의 개>나 <반칙왕> <나도 아내가…>처럼 소심한 대학강사나 은행원으로 기조차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착역은 보수 전통 가족?
그래서 이즈음의 한국영화들은 가족을 거부하면서도 철저히 가족의 이데올로기 안에 안주하고 있는 자기 모순을 드러낸다. 결국 남자는 남자를,
선생은 제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번지점프…>나, 이혼녀보다는 옆집의 착한 처녀가 총각을 쟁취하는 <나도 아내가…>나 죽어도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하루>나 남편에게는 소리를 질러도 시댁 식구에게는 지극히 순종적인 <선물>의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가족 외에 어떤 형태의 가족도
고려하지 않는다. 가족 지우기에서 전면적인 현실 회피의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까닭은 이렇듯 영화 속에서 가족의 영향을 대신하는 나름의 대안적인
체계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대안은커녕, <눈물>이나 <세기말>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근자의 한국영화들은 주류사회
혹은 가부장제사회에 대한 딴죽조차 걸지 못하는 양순함을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 내게 당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명제는 ‘아버지,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라는 명제와는 애초부터 다른 것이다. 기존 체제에 대한 투항과 무관심이 반반씩 섞인 기형적인 판타지로의 침잠.
그것은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찬찬한 성찰이 결여된 어지러운 2000년대 소비주의 문화의 아찔한 속도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