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온 것들과 쌓아갈 것들
- 이제는 드라마와 영화, 양쪽 무대를 모두 오가는 작가가 되셨어요. 드라마의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영화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드라마 작가는 거미가 실을 잣는 것처럼 대중이 함께 꾸는 꿈과 함께하는 생각을 만드는 사람 같아요. 우리는 각자 다른 꿈을 꾸지만, 그중 하나가 지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필요한 삶의 조건을 담을 수 있잖아요.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이라면 밤에 꾸는 꿈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두려워하고, 무엇을 꺼내서 보고 싶어 할까? 거기에 맞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드라마처럼 커다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 같아요. 영화는 조금 달라요. 한 사람의 깊은 꿈을 더 많이 생각하게 돼요. 드라마는 밝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볼 수 있지만, 영화는 사람이 많은 극장에서 봐도 결국 개인적이잖아요.
- 2002년 제5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전기공들>을 연출하셨죠. 당시 <씨네21> 인터뷰에서 “방 벽지에 대한 묘사가 색다르다”며 벽지에 몰두하는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았더라고요. 류성희 미술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색깔이라는 요소가 원래 작가님에게도 있었네요. (웃음)
= 그때 <헤어질 결심> 같은 벽지를 도배하고 찍었어요. 처음 볼 땐 갈매기인데 계속 보면 오리로 변하는 무늬예요. 우리는 만나기도 전부터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거죠. (웃음) 생각해보면 화면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벽지잖아요. 저나 박찬욱 감독님이나 류성희 미술감독님은 정말로 사실적인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평소에 쓰지 않는 다른 벽지를 바르면서 이 세계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시작하고 싶은 거죠. 환상적인 세계지만 그것을 순간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시각적인 요소를 좋아합니다.
- 작가님 특유의 문어체적인 문체도 벽지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요.
= 예전에는 문체 때문에 배우 캐스팅이 힘들 때도 있었어요. 다행히 <헤어질 결심> 이후에는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번역서와 자막 달린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건지 멈출 수가 없어요. 긴 시간이 흐르니 제 스타일이 됐나봐요. 매번 문학적으로 쓸 수는 없으니 어쩌면 제가 넘어서야 하는 한계죠. 문어체지만 자연스러울 수 있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도 그래요. 이번 작품은 김희원 감독님을 위해 쓰는 글이니까 저한테서 빼야 할 것들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현실에 있던 이야기에서 환상적인 무언가가 쓱 올라올 때가 있어요. 사실 그때 무척 신이 났어요. (웃음) 마치 비행기가 뜨는 순간 느껴지는 부유감처럼.
- 이건 개인적인 고민이기도 합니다만, 챗지피티(ChatGPT) 시대에 글쟁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한 적은 없나요.
= 오히려 챗지피티가 우리를 많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요. 원래 인터넷 검색을 많이 안 하는 편이에요. 예전 보조 작가가 인터넷 자료를 취합했고 저는 책을 읽는 편이었거든요. 대본을 쓸 때 필요한 자료를 빨리 모아줄 수 있다는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홍신>에서 시작한 <작은 아씨들>
정서경 작가는 이야기의 원형을 동화에서 찾는 창작자다. <작은 아씨들>은 <분홍신>과 <푸른 수염>, <마더>는 <헨젤과 그레텔>, <헤어질 결심>은 <인어공주> 모티브로 이해할 수 있다. “제가 쓰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이 이야기는 분명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든 제가 처음 다루는 것일 리가 없고, 분명 제가 반복하는 모티브가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원형이 되는 동화를 찾으면 겉으로 볼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더 큰 문제를 알 수 있고, 대본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먼저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에필로그
네 번째 방문이었다. 작업실을 찾을 때마다 정서경 작가는 다양한 차와 음료 중 무엇을 마시겠느냐는 인사를 먼저 건네고, 손님의 입맛에 잘 맞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지면에 들어갈 인터뷰보다 더 재미있는 수다가 시작된다. 한번은 겨울 코트 벨트를 잃어버린 날이 있었다. 내가 갔던 곳을 차례로 재방문하며 분실물을 찾아 헤맸는데, 그중 하나가 정서경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서경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코트 벨트 찾으셨어요? 문득 걱정이 되어 톡해봅니다 ㅎ.” 나의 행적을 샅샅이 복기해봐도 결국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을 전하자 “벨트 없이도 예쁜 코트였다”며 위로를 전했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났을 때도 그는 벨트 얘기를 잊지 않고 꺼냈다. 내가 만난 정서경 작가는 어떤 대화를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꾼이면서 섬세하고 배려심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준 상대에게 사랑이 넘친다. 남편과 두 아들 얘기가 나올 때마다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 어떤 얘기를 해도 즐겁다고 한다. <작은 아씨들>의 원상아와 박재상(엄기준)이 쇼윈도 부부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 관계라 놀랐다고 하자 돌아온 그의 대답도 예상 밖이었다. “제가 남편을 너무 사랑하나봐요.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를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의 애정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이어질 때도 있다. 김희원 감독을 만났을 때 자신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는 직감을 받았다는 그는 두세 번째 만남에서 대뜸 “감독님은 나를 좋아하게 될 것”(“내가 감독님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가 아니다!)이라고 했단다. “감독님도 어처구니가 없었을 거예요. (웃음) 그런데 김희원 감독님이 우리 남편하고 비슷해요. 제가 남편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남편쪽에서 저를 필요로 하거든요.” 박찬욱 감독과의 협업은 물론 <마더> <작은 아씨들>에서 묻어나왔던 다정함과 긍정적인 마음, 동화적 상상력의 원천을 발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