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53개국 137편의 영화들을 안고서 올해도 치열히 경계선을 가로지른다. 메가박스 백석, 메가박스 일산벨라시타,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춤추고 사유하는 다큐멘터리 10편을 추천한다. 영화제는 9월22일부터 29일까지 8일간 열린다.
<킵 스텝핑> Keep Stepping
루크 코니시 / 호주 / 2022년 / 91분 / 개막작, 오픈시네마<킵 스텝핑>의 피사체들은 하루 중 걷는 시간보다 스텝을 밟는 시간이 더 많다. 그들의 일상은 댄스 플로어 위에서 가장 자연스럽다. 밤의 길거리, 호주 시내 곳곳의 지하 연습실, 그리고 경연장에 뿌리내린 <킵 스텝핑>의 카메라는 스트리트 댄서들의 단순한 열정과 집념, 그 이면의 복잡한 사회학을 리드미컬하게 응축한다. 중심인물인 가비와 패트리샤는 이민자 여성이자 서브 컬처의 대변자들로, 영화는 호주 최대 스트리트 댄스 대회인 ‘Destructive Steps’(파괴적 스텝)에 도전하는 여성들의 여정을 고집스러우리만치 묵묵히 좇는다. 한껏 도취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장면을 고조시키는 동안 비주류 예술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인종차별, 비자 연장의 문제 등도 한쌍의 그림자가 되어 요동친다. 춤은 곧 신나고 격렬한 투쟁이 된다. 왁커 립제이가 심사위원으로 등장하는 등 <스트릿 우먼 파이터> 속 땀과 근육, 여성적 경쟁과 우정의 의미에 환호한 이들에게 만족스러운 선택지가 될 영화다. _김소미 기자
<세컨 챈스> 2nd Chance
라민 바라니 / 미국 / 2022년 / 89분 / 글로벌 비전1960년대 후반 피자 가게가 불타버린 것을 계기로 방탄조끼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는 데이비스의 진술은 방탄조끼의 성능을 입증하고자 조끼를 입은 자신의 배에 192발의 총알을 발사하고, 이 광경을 카메라로 찍어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업가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후 그는 총기 폭력을 미화하는 B급 스너프 범죄영화를 연출해 많은 경찰관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세컨 챈스>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의 젊은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늙은 데이비스의 모든 말들이 진실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의는 그토록 견고하다고 한 방탄조끼가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비극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흔들린다. 유머와 부조리의 경계에 선 호전적 사업가의 인생을 통해 폭력과 자본주의에 의해 운항되는 미국의 초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_장병원 수석 프로그래머
<발코니 무비> The Balcony Movie
파벨 로진스키 / 폴란드 / 2021년 / 100분 / 마스터즈<발코니 무비>는 놀랍도록 이름 그대로의 영화다. 카메라는 영화 내내 각도를 조금 달리할 뿐, 발코니에 머무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과 풍경을 수집한다. 놀라운 공기를 생성하는 것은 프레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우연한 움직임들이다. 예시, 킥보드를 탄 어린 소녀가 화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화면 밖에서 여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킥보드를 던져두고 달려나간다. 보이는 것은 쓰러진 킥보드뿐, 그러나 화면 밖 소동의 소리로부터 영화가 새로이 재생된다. 붐마이크는 종종 행인의 말에 귀 기울이려 태연한 리듬으로 프레임을 침범한다. “삶의 메타포로서의 행인”, 팬데믹 시대에 영화의 새로운 장소로 발탁된 발코니는 뜻밖의 친밀함, 사소함, 아직 가능한 서정의 증명이 된다. 카메라의 세상은 이렇게나 좁아서 아름다울 수도 있다. _김소미 기자
<키이우 재판> The Kiev Trial
세르게이 로즈니차 /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 2022년 / 106분 / 마스터즈<키이우 재판>은 1946년 1월에 열린 홀로코스트 전범 재판에 대한 아카이브 모음집이다. 미공개 아카이브 영상을 원재료 삼아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은 10여명의 피고인 진술과 목격자 증언을 포함하여 재판의 주요 순간을 재구성한다. 이들 중 다수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바비 야르 나치 학살의 생존자였다. 전쟁 범죄의 여파를 파고들어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키이우 재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자행하고 있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평을 담고 있다. 기록 필름 가운데 일부를 편집한 것에 불과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법정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생생함이 살아 있는 영화는 나치 전범 재판소에서의 판결이 오늘날의 청사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_장병원 수석 프로그래머
<부부> A Couple
프레더릭 와이즈먼 / 프랑스, 미국 / 2022 / 63분 / 마스터즈<부부>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쓴 일기를 대본 삼아 진행되는 모놀로그 영화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드라마는 특정 공간이 산출해내는 일과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맥락이 펼쳐지는 과정을 관찰한 결과에 가깝다. 소피아는 남편과의 관계 및 결혼 생활을 성찰하는 위치에서 톨스토이라는 가부장의 집 바깥에 머문다. 몇십년간의 일기에서 그녀는 자신에 의해 해석되고 성찰된 면면으로 구성되는 가상의 공간에 있지만, 그곳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와이즈먼의 드라마, 다시 말해 특정 공간이 기능하는 맥락의 드라마는 이번에는 소피아의 말을 통해 드러난다. 이 부지런한 노장은 역병의 시기에 급속히 확산된 가상적 공간의 드라마를 탐구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_채희숙 프로그래머
<불안정한 사물들2> The Unstable Object 2
다니엘 아이젠버그 / 미국 / 2022년 / 204분 / 마스터즈<불안정한 사물들2>는 노동과 생산에 관한 일련의 이미지들을 약 3시간30분 동안 끊임없이 산출해낸다. 상호작용을 이루는 재료들은 각각 의수, 장갑, 청바지가 제작되는 공장의 생산 라인이다. 영화는 시간에 길들여진 사람의 능숙한 손놀림, 오차 없이 움직이는 기계의 절단 행위, 반복되는 소음과 운동들을 관찰할 것을 제안하며, 그 방법론으로 이미지의 끈기 있는 지속을 택했다. 민첩하고 날렵한 이 풍경 속에, 그렇다면 불안정한 것은 무엇인가. 손과 기계가 한편이 되어 생산한 또 다른 손과 발들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감춰진 생산 과정의 실질적 속성과 의미, 존재 자체를 들추어낸다. 노동이 노동의 도구를 만드는 은유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사물들2>의 지속성은 곧 불안정한 지속 가능성이라는 모순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_김소미 기자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 Everything Will Be Ok
리티 판 / 프랑스, 캄보디아 / 2022년 / 98분 / 마스터즈리티 판 감독은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정치적 폭압이 만든 공포의 기억을 다뤄왔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남은 크메르루주 학살에 관한 기록을 넘어, 인류의 역사에 드리운 비극을 대면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신작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는 동물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우화. 혁명으로 이 세계의 주인이 된 동물들은 20세기의 유산, 이미지를 본다. 조르주 멜리에스와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에서 시작하여,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과 학살, ‘Everything Will Be OK’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희생된 미얀마의 시위 참가자의 사진까지. 혁명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폭력과 학살로 귀결되는 이 연쇄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된다. _강진석 프로그래머
<무첸바허> Mutzenbacher
루스 베커만 / 오스트리아 / 2022년 / 100분 / 국제경쟁영화 출연자를 찾는 신문 광고를 보고 모여든 다양한 남성들이 감독의 지시에 따라 20세기 초 발표된 독일어 포르노그래피 소설 <요세피네 무첸바허, 혹은 비엔나 매춘부의 회고록>을 읽는다. <무첸바허>에는 성을 둘러싼 다양한 위계와 고정관념의 자리를 바꾸는 장치들로 가득하다. 남성 작가가 쓴 여성의 회고록. 그 회고록을 읽는 남성. 화면 밖에서 그것을 지시하는 여성감독. 그녀는 때로는 마치 정신분석가처럼 프로이트의 소파에 앉은 남성들에게 소설의 내용에 대한 의견이나 해석을 묻는다. 10대 초반 소녀가 성에 탐닉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 문제적 텍스트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가지각색이다. 그 복잡한 지층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제 사회를 지배하는 공고한 남성성에 감춰진 균열이 드러난다. _강진석 프로그래머
<우리의 심장박동은 폭발하는 별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All of Our Heartbeats are Connected Through Exploding Stars
제니퍼 레인스포드 / 스웨덴 / 2022년 / 77분 / 글로벌 비전2011년 3월11일, 현대사에서 가장 큰 쓰나미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여전히 그날의 여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유영한다. 비탄의 그물망은 걷잡을 수 없이 폭이 커서, 바닷속을 떠도는 쓰레기와 심해 생물들에게까지 손길을 뻗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고 자신 또한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독백은 결국 하와이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자들에게도 닿는다. 스톡홀름 출신의 비주얼 아티스트이기도 한 제니퍼 레인스포드 감독은 바다가 매개하는 전 지구적 연결성에 몰두해, 재난이 남긴 슬픔을 내면적 차원에만 두지 않고 생명-비생명을 아우르는 시각적 증거로도 포착하려 한다. _김소미 기자
<미얀마의 산파들> Midwives
스노우 흐닌 아이 흘라잉 / 미얀마, 독일, 캐나다 / 2022년 / 91분 / 아시아경쟁학살의 역사를 반복하며 대치 중인 미얀마의 종교 분쟁 속에서 각각 불교도와 무슬림인 두 여자가 한팀이 됐다. 이들은 종교 탄압으로 고립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로힝야족 임신부들을 위해 산파를 자처했다. 영화는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서 보낸 두 여자의 5년을 종합하면서, 일상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는 폭력과 차별의 위용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마땅한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산모들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고난스럽고 박해받는 로힝야족의 처지는 심화되는 가운데, 여성들의 우정만은 묘한 낙관을 그린다. 화장하고 새 옷을 고르는 시간, 실없는 대화나 말싸움, 아이가 태어난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감도는 감출 수 없는 화색 속에서 산파들은 도처의 죽음과 대치한다. _김소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