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자리에서 “목소리 연기 한번 보여달라”는 무례한 요청을 받고도 유연하게 선보이며 대처했다는 김보나 성우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들으며 사실 속으로 몹시 감탄했다. 툭 치면 우르르 쏟아질 정도로 그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온 걸까. 자연스러운 목소리 연기를 위해 자신을 더 알아가기 시작한 김보나 성우는 자신의 성대 길이와 두께까지 단번에 설명한다. 애니메이션부터 영화, 게임, 노래, 오디오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질주하는 그에게 이토록 성우의 자리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 처음부터 성우를 꿈꾼 건 아니라고 들었다. 성우의 어떤 점에 끌렸나.=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성우에 관심이 많았다. 워낙 소리에 예민한데 TV에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을 상상하곤 했다. 특히 TV만화 <웨딩피치>의 케빈 역과 <슬레이어즈>의 제르가디스 역을 맡았던 김승준 성우의 팬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우는 특별한 목소리를 타고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라 여겼다. 그러다 학부를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는데 당시 아나운서 역할이나 내레이션 녹음 부탁을 많이 받았다. 목소리 연기에 대한 호감이 직업적 호기심으로 조금씩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 후에 본격적으로 성우 스터디에서 공부했는데 처음으로 지원한 대원방송에 3차까지 붙었다. 운이 좋았다. 잘하면 진짜 성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년 동안 더 몰두했고 결국 대원방송 7기에 최종 합격했다.
- 비언어적 요소를 가리고 오로지 목소리로만 연기해야 한다. 어떤 점에 가장 신경 쓰나.= 목소리 연기도 결국 연기라 맥락은 비슷하다. 다만 소리로만 연기할 때는 시각적 정보를 채울 수 있도록 상상력을 더 발휘해야 한다. 더빙은 그림에 정확하게 부합할 수 있도록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선을 지켜야 한다. 또 오디오 드라마의 경우 오로지 소리만 남기 때문에 무표정이나 말의 여백을 호흡으로 채워야 한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호흡을 잘 안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다.
- 유튜브 채널 <성우김보나>에 지금까지 맡은 캐릭터를 아카이빙하며 작업 후기를 남기고 있다. 크고 작은 모든 역할에 애정이 묻어난다.= 그게 티가 나다니 다행이다. (웃음) 오늘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도 12가지 정도의 캐릭터를 녹음해야 한다. 한 캐릭터를 10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루에 10개를 소화하는 경우도 있다. 장르도 워낙 다양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인물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창작자가 애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비중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기계적으로 대하는 건 창작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유튜브에 아카이브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동영상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컷을 하나씩 캡처해서 개인적인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모조리 기억하고 싶다.
-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다면.= 어려운 질문이다. 늘 지금 맡는 캐릭터가 가장 소중하지만 최근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를 연기했다. 개인적으로도 <토르> 시리즈를 너무 좋아해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녹음 나흘 전에 스케줄이 잡혀서 무척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대사와 화면을 외우다시피 준비를 하고 무탈하게 마쳤다. 나중에 모니터링할 때 ‘와, 나 고생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내 눈에도 애정을 쏟은 게 보였다.
- <날아라 호빵맨> 시리즈에서 짤랑이 동생인 딸랑이는 아기에 가깝고, <라디앙>의 멜리는 차분한 목소리와 난폭한 목소리를 오가는 이중인격이다. 목소리 구현 범위가 상당히 넓다.= 제일 편한 건 내 연령대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잘 아는 것이 친숙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노년의 목소리가 가장 어렵다. 어쨌든 유아기는 내가 먼 옛날에 통과해온 시기지만 노년은 아직 맞닥뜨리질 않아서 어떻게 체화해야 할지 여전히 헷갈린다. 최대한 그럴싸하게 흉내내려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를 잘 내고 있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평소에 어르신들이 통화하는 소리나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엄청 집중해서 듣고 구석에서 따라 해보기도 한다. 꾸준히 배우고 연습한다.
- 2000년대 초 TV에서 방영했던 만화영화의 리마스터 버전이 유튜브에 올라오면 “KBS 버전이 아니네”, “투니버스 버전이 아니네”라는 아쉬움 섞인 댓글이 압도적이다.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 말려> <도라에몽> 등 장기간 방영한 작품도 중간에 성우가 바뀌면 시청자가 많이 들썩인다. 대중이 목소리 연기를 단순히 기능적 요소로 보지 않고 하나의 기억장치로 여기고 있다.= 이 현상이 결국 더빙판에 대한 선호가 높다는 전제하에 나타나는 것이라 성우로서 기쁘다. 본래 더빙판은 오리지널의 부차적인 아동용 버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자막이 달린 원본을 봐야 ‘찐’을 봤다는 분위기도 있었고. 그런데 더빙을 새로운 창작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목소리 연기를 향한 애정이 더 생겨났다. 나도 어릴 적 <짱구는 못 말려> 시리즈를 자막판으로 처음 접했다면 그게 더 익숙했을 테지만, TV에서 더빙판을 제일 먼저 접하니 결국 그게 나의 원작이 되었다. 각자의 처음을 정답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이런 상황이 생겨나는 듯하다. 다만 성우로서 더빙작이 원작인 것처럼 느끼게 할 소명의식은 있다.
- 성우라고 하면 과거엔 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 더빙 작업만 떠올렸지만 이제는 게임, 오디오 드라마, 내레이션 등으로 그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요즘엔 오디오북 녹음이 정말 많아지고 있다. 단행본 낭독부터 교과서와 각종 학습용 도서까지 그 범위가 넓다. 오디오가 빠지는 도서가 거의 없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일하고 있다. 그외에도 광고, 게임, 드라마 등에서 내레이션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도 성우 지망생 때까지만 해도 성우의 일이란 애니메이션 더빙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애니메이션도 국가별로 다양한 작품이 세분화되어 있고, OTT가 보편화되며 더빙 작업도 늘었다. 또 청취 연령별로 19살 이하 콘텐츠와 이상 콘텐츠가 나뉜다. 웹소설 오디오북은 수위가 조금 높은 편이다. 개인적으로 노래도 겸해서 <엔칸토: 마법의 세계> 같은 뮤지컬 작업도 하고 애니메이션 주제가도 부르고 있다.
- 산업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레 각자도생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대부분의 성우가 1인으로 일해서 셀프 홍보가 중요한 것은 맞다. 그런데 이 직업이 독특한 건 내가 이전에 작업한 것을 관계자들이 쉽게 들을 수 있다보니 게임을 하다가,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혹은 오디오북을 듣다가 일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 내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기만 하면 유연하게 다른 작업으로 연결된다.
- 전국고교성우대회에 참여하는 고교생의 작업물이 온라인에서 주목받기도 한다. 오디오 산업이 다음 세대의 유입을 독려하는 게 인상적이다.= 최근 한 고교성우대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성우 김보나입니다” 하고 인사하는 순간 아이들이 막 자지러진다. (웃음) 그때 성우라는 직업의 인지도가 대중적으로 안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디즈니 영화나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어린이 성우가 직접 더빙하는 경우도 많아서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흐름을 기대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