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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콘텐츠가 뜬다] ④오디오 무비 ‘극동’ 곽경택 감독 "녹음실, 첩보영화 현장처럼 만든 이유는"
이자연 사진 오계옥 2022-09-22

<친구>(2001), <태풍>(2005), <극비수사>(2014),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2019)의 곽경택 감독이 <극동>을 통해 보이지 않으나 선명하게 보이는, 기묘하고 독특한 체험을 선사한다. 그가 오랫동안 쌓아온 영화적 감각을 오디오 무비라는 장르에 접목하면 청취자는 이내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우리는 과연 본 것일까, 들은 것일까. 새로운 수수께끼를 풀 차례다.

- 857억달러의 비자금을 둘러싼 한국, 북한, 미국, 러시아의 추격전이다. 이야기를 처음 고안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 20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평양연극영화대학 출신 탈북자 친구가 있다. 전작 <태풍>에서 인연이 되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가 이전에 호위사령부에서 근무했던 일화를 말해주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 같은 곳으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어머니가 김일성 사단에 식사를 제공하는 조리사 일을 했는데 하루는 김일성이 산책하다 엄마를 따라온 이 꼬맹이를 보게 된 거다. 몇 마디를 나눠보니 아이가 무척 영특했고, 사주까지도 재물운이 몹시 컸단다. 그렇게 아이를 유럽으로 조기 유학 보내면서 김일성 후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세계 증권가의 큰손으로 키웠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워낙 영화적이었다. 여기서 이수영(유재명)의 모델을 발전시켰고 <극동>의 살을 붙여나갔다.

- 김강우 배우는 작업 후기에 “걸어들어가서 기어나왔다”는 표현을 썼다. 작업 과정이 고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 오디오 무비이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을 온전히 목소리로만 보여줘야 했다. 보통 영화 촬영을 하면 하루에 2~3신 정도 찍는다. 그런데 <극동>은 처음에 잘못 계산해서 하루에 10신을 잡아놓고 녹음을 했다.

연기를 뽑아내는 에너지는 동일한데 평소보다 4~5배 많은 분량을 진행했으니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힘들 줄 아무도 몰랐다. 연기는 결국 액션과 리액션의 반복이다. 서로 반응하는 합이 중요하기 때문에 홀로 녹음하더라도 우리가 배우의 고조된 감정과 같은 레벨로 계속 맞장구쳐줘야 했다. 그래야만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액션에 걸맞은 리액션을 뽑아내는 게 가장 어려웠다.

- 녹음실을 극중 상황과 비슷하게 구현했다. 감독도 배우들과 함께 들어가 있었다고. 방금 말한 자연스러운 액션과 리액션을 담아내기 위해서인가.

= 그렇다. 녹음 전부터 앉아서 하는 호흡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스탠드 마이크를 사용하는데 일부러 붐 마이크까지 활용했다. 배우들이 실제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다니며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걸어갈 때와 서 있을 때 말하는 느낌이 다르지 않나. 그런 미묘한 지점을 포착하고 싶었다. 학부생 때 소리로만 영화를 만드는 과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훈련이 오늘날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정보도 있다. 최소한의 시각적 정보를 화면에 띄우면서 오디오 콘텐츠의 한계를 보완했다.

= 초반에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는 장면이나 총소리가 가득한 격투 신에는 화면 위로 간단한 이미지와 섬광 효과를 주었다. 장면 전환이나 회상 신 등 소리만으로 알기 어려운 시간의 전환도 같은 방식을 차용했다. 다양한 사투리와 외국어 때문에 자막도 넣었지만, <극동>의 특징은 극중에 통역사가 나와 자연스레 통역을 해준다는 점이다. 오디오 무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리이기 때문에 최대한 음성으로 이해를 도우려 했다. 그래서 테크니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배트맨>에서 자동차가 ‘부앙’ 하고 지나갈 때, 엔진 소리만 나는 게 아니라 밑바탕에 ‘티티티티’ 하는 작은 소리가 함께 깔려야 한다. 이렇게 공감각적 이해를 돕는 이미지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 처음엔 기존 라디오 드라마 구성을 먼저 떠올려서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이 들어간 흐름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전개 속도가 빠르고 이야기상의 생략도 많다.

= 그래서 청취자가 스토리를 잘 따라올 수 있을지 고민이 깊었다.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중간에 신 순서를 변경하거나 대사를 바꾸는 일도 많았다. 이 단계에서 사운드가 서사적 정보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했다. 특히 돌비 애트모스로 제작하다보니 사운드 레이어가 겹칠 때 잡음처럼 들리지 않도록 연기자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따야만 했다. 그래야 이야기가 속도 있게 흘러가면서도 편하게 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일까. 박진감 넘치는 난투가 벌어질 때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춧가루의 매운맛 좀 봐라!”라는 대사를 통해 외국인과 대적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 상황을 유추할 수 있도록 주고받는 대화를 세밀하게 설정했다. 등장인물도 워낙 다양하다보니 각각의 구별 지점을 잘 드러내야 했다. 목소리 톤뿐만 아니라 사투리도 조금씩 다르게 조절했다. 녹음 전에 배우와 엔지니어가 함께 논의하면서 끊임없이 조율 과정을 거쳤다. 목소리가 너무 비슷하면 아쉽지만 성우를 교체해야 할 때도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작품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감독이 응당 해야 하는 일이다.

- 오디오 무비라고 하면 왠지 고급 오디오 디바이스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 그렇지만도 않다. 네이버 바이브에서 돌비 애트모스 사양 그대로 송출하기에 평소 사용하는 이어폰이나 헤드셋으로도 충분하다. 감독으로서 집에 있는 스피커를 활용하는 걸 가장 권하고 싶지만 요즘 스마트폰도 사운드 지원이 잘돼서 고퀄리티의 음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 ASMR의 대중적 인기부터 독서 방식의 변화까지 많은 이들이 눈으로 보기보다 귀로 들으려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 보는 게 너무 피곤해진 것 같다. 보고 읽고 생각할 거리가 굉장히 많은 세상이다. 요즘 주변에 집 짓는 영상을 본다는 이들이 굉장히 많다. 그냥 아무런 말 없이 집만 짓는데 그걸 멍하니 본다더라. 과잉 정보에서 벗어나 쉬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 해상도가 높을수록 눈은 그걸 인식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피로도가 높을 수밖에. 이런 상황에서 모든 걸 그냥 흘려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 올해로 데뷔 25년차인 베테랑 감독에게도 오디오 무비 작업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소회를 밝힌다면.

= 영화 촬영이 끝나면 후시녹음(ADR) 과정을 거친다. 그 단계가 영화감독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다. 배우에게서 촬영 당시의 목소리를 똑같이 뽑아내서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꼭 필요한 부분만 보완하면 되는데, 오디오 무비는 1부터 10까지 후시녹음을 거쳐야 하니까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또 영화처럼 찍어둔 영상을 보며 레퍼런스에 기댈 수도 없으니 계속 시도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오랜 인내가 필요했지만 전과 달리 청각적 상상력을 모두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내게도 새롭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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