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57억달러에 이르는 북한 비자금을 손에 쥔 이가 있다. 북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한국 영사관으로 들이닥친 이수영(유재명)은 자신이 해당 비자금의 관리자라고 소개한다. 상황 파악을 위해 마주앉은 한국 영사 안태준(김강우)에게 수영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기 대신 밖에서 사람을 만나달라고.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안겨주겠다고. 북한 최고 특수 해커 집단의 리더 강영식(곽동연)은 그런 수영의 뒤를 면밀히 쫓는다. 9월26일 네이버 바이브에서 공개되는 오디오 무비 <극동>은 막대한 액수의 비자금을 두고 추격전을 펼치는 액션 스릴러로 <암수살인> <극비수사>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소총을 들고 땅을 구르며 오로지 목소리로만 상황을 구현해낸 세 배우 김강우, 유재명, 곽동연이 <극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우 김강우, "실제 현장을 상상하며 동작과 표정을 머리에 그려나갔다"다른 캐릭터들은 대부분 북한이나 러시아 출신의 인물들이다. 그런 차별점을 고려해 태준을 지금 현실에 존재하는 대한민국 40대 가장의 모습으로 이질감 없이 연기하려 했다. 또한 태준이 국정원 소속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거나 진지하기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표현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좀더 이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달까.
사실 처음엔 목소리로만 연기한다는 생각에 쉽게 마음먹고 시작했다가 호되게 고생했다. (웃음) <극동>이 첩보 액션 스릴러 영화다보니 총격전이나 카 체이싱 등의 액션 장면이 많은데 오디오 무비라는 한계 때문에 디테일을 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권총, 서류 가방 등의 소품을 현장에서 직접 다뤘고 붐 마이크를 이용해 실제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연기했다. 또한 시각적인 도움 없이 오로지 청각적인 요소들로만 해결해나가야 했기에 순간순간 촬영할 때마다 실제 현장에 있다고 상상했고, 몸동작과 표정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나갔다. 다른 무엇보다 감정을 극대화하려 했다. 보여지지 않는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좀더 디테일한 호흡과 정확한 대사 전달이 필수였다. 녹음실 안에서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기존 영화에 비해 제작 기간이 짧았을 뿐 에너지적으로는 절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배우 유재명, "다층적인 호흡과 목소리의 신뢰감이 중요했다"곽경택 감독님과 <소방관>을 작업하고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에 오디오 무비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극동>의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북한 비자금이란 소재와 큰 스케일의 로케이션, 치밀한 심리묘사 등 실사영화로 만들어야 할 작품 같았다. 그런데 오디오로만 만든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무척 흥미로웠다. 이수영은 김일성의 명령하에 서방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비상한 수완으로 엄청난 금액을 모아 북한 정권 유지에 큰 몫을 한 인물이다. 한편으론 동포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기도 하는, 선인인지 악인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감독님이 다층적인 심리묘사에 초점을 두자고 하셨고 나 역시 속내를 쉽게 간파할 수 없는 수영의 호흡과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상이 없어 눈빛이나 몸짓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 <극동> 작업의 핵심이자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청자가 영상을 연상할 수 있도록, 또 수영의 절실함을 파악하고 궁금해하며 계속 쫓아올 수 있도록 목소리에 신뢰감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낮고 묵직한 힘을 가진 소리를 내는 데 주력했다. 모든 작업자와 감독이 오로지 내 소리에만 집중하고 내 목소리 연기의 어떤 부분이 어색하고 실제 호흡을 찾기 위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탐색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색다른 경험이었다. 젊은 수영을 맡을 수 있었던 것 또한 목소리로만 연기했기에 가능했던 부분이라 생각한다.
배우 곽동연, "몸이 통제된 만큼 짙은 농도의 감정을 표현했다"강영식은 개인의 안위보다 집단의 이익과 목적이 더 앞서는 인물이다. 아마 꽤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정신적·신체적 훈련을 거쳤을 테고, 일정 계급에 도달했을 때부터는 적군과 아군 모두를 아우르는 위협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목소리에 거친 느낌과 또 경험에서 비롯된 무게감이 배어나오도록 연기했다. 탈북민 출신인 곽문완 작가님이 실제 북한 군인, 고위직의 억양을 녹음한 파일을 전달해 대사 고증 수준을 월등히 높여주었다. 그 파일을 들으면서 북한 언어의 메커니즘을 최대한 익히면서 억양이 몸에 배도록 했다. 그 뒤로 리허설을 할 때 필요한 감정을 추가하고,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억양을 변형하며 연기했다. 어려웠던 건 녹음할 때 동선이나 몸이 통제되기 때문에 원래보다 짙은 농도로 감정을 끄집어내야 했다는 점이다. 아주 빠른 속도로 험한 길을 운전하는 장면을 녹음할 때가 기억난다. 그 신의 호흡을 살리기 위해 감독님이 몸의 긴장을 더 올려보자는 디렉션을 주셨다. 실제로 운전을 하다보면 어깨나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근육들이 수축된 상태에서 나오는 호흡이 있지 않나. 그걸 상기하면서 연기했다. 오디오 무비는 목소리를 듣고 각자 떠오르는 대로 캐릭터를 이미지화하며 감상할 수 있다. 서로 같지만 다른 작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감상하는 관객에게도 새롭고 재밌는 도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