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 이야기인데, 서울대학교에서 국립대 법인화를 밀어붙이려는 대학본부와 학생들이 충돌해서 학생들이 대학본부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학생들이 본부 앞 잔디밭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페스티벌에 몇몇 인디밴드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대학본부와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이름을 합쳐서 ‘본부스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것 같은 이 기획이 예상치 못하게 발전하게 되자, 대학본부에서는 공연 전날 장비 반입을 막기 위해서 셔틀버스로 길을 가로막는 웃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치러진 이 페스티벌은 결과와 과정 모두에서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때 본부스톡에 참여한 팀 중에 내가 활동하는 밴드 브로콜리너마저도 있었다. 당시에 우리는 홍대 상상마당에서 ‘이른열대야’라는 이름으로 장기공연을 하는 중이었지만 행사 취지에 공감해 공연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밴드의 모든 장비가 공연장에 설치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타와 멜로디언만 가지고 공연을 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출연일은 본부스톡의 두 번째 날이었다. 공연은 낮부터 이어졌다. 첫날 공연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많이 전해져서인지 페스티벌 분위기가 꽤 그럴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잔디광장에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도착해서 앞서 공연하는 팀들의 모습을 보면서 순서를 기다렸고, 어느덧 무대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악기가 간소해서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지만 무대가 갖는 의미 있는 공연이어서 긴장감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앞 팀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연주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아서 꽤 시끄럽기도 했다. 웬만하면 통화하지 않고 나중에 따로 연락할 법도 했는데도 잠시 전화를 받았던 것은 전화를 건 사람이 최근에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동창 신욱이였기 때문이다.
윤신욱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이었는데, 항상 반 친구들을 웃겨주던 밝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노는 것도 좋아하고 축구도 좋아했던 친구. 좋아하는 여학생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들어주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대학 진학 후 연락이 뜸하다가 군 입대한 뒤로는 소식을 몰랐는데 얼마 전에 연락처를 물어 전화를 해왔던 차였다.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음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듣고 반가웠다고 꼭 한번 보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며칠 전이었다. “내 지금 바로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이따가 통화하자 알긋나” 하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전화를 받자 상대편에서 들리는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친구의 회사 동료라고 했다. 그가 전한 소식은 부고였다. 강원도 어느 장례식장에서 신욱이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했다. 최근에 나에 대해 이야기 많이 했다고, 혹시 장례식장에 와줄 수 있느냐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같다’고 설명하는 건 정말로 그 순간 엄청나게 멍해졌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알겠다”고 “잠시 후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시끄러웠는데 또 너무 조용했고 무대에는 또 올라가야 했고….
공연이 끝난 뒤, 그 번호로 다시 연락을 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렇지 이제 이 번호로 연락할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병원 이름도 지명도 연락을 했던 사람의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고 밤은 깊었고 다음날 공연은 해야 했고.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다음날이 되어버리고. 그러고 나서 나는 꽤 오랫동안 이 일을 곱씹어야 했다. 전화가 처음 왔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확인을 더 했어야 했나. 아니면 답이 올 때까지 계속 연락을 시도했어야 했나. 다니던 회사로 전화를 했다면 늦게라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대체 어쩌다가 어떤 연유로 녀석은 갑작스레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된 걸까.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그때의 황망한 상황들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황망하다’의 뜻은 ‘마음이 몹시 급하여 당황하고 허둥지둥하는 면이 있다’라고 한다. 주로 조문의 뜻을 표할 때 많이 사용되어서, 잘 모를 때는 이 단어가 조문에 쓰이는 말로 슬프고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았을 때는 이 말이 본디 뜻과는 조금 다르게 쓰이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작별의 순간을 언제나 준비할 수 없기에 부고를 마주하고 나서 황망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인 것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그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놓치지 않고 해나가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때 나는 그러지를 못해서 지금까지도 윤신욱을 떠올릴 때면 황망한 마음이 된다.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을 때 우리는 스물하나, 스물둘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도 갑작스럽게 전화가 와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했었지. 입원해 있던 너는 팔을 다쳐서 붕대를 크게 감고 있었지만 여전히 개구진 표정으로 나를 반겨주었지. 너는 어떻게 대학생이 되어도 예전이랑 똑같냐 하고 혀를 찼었고,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전공책(<커뮤니케이션학 개론>)을 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지. 시간은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참 신기하다. 네가 연락주었을 때, 못 본 지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찾아줘서 참 반가웠는데. 나는 결국 찾아가보지 못하고 이렇게 여전히 황망해하고 있구나. 멀리서 편안하길 바란다.
<분향> _브로콜리너마저
떠나가는 사람의
하얀 옷자락을
잡으면 흩어질 것 같은 그 끝을
바라보고만 있었네
참 오래간만이네 너는 웃고만 있네
네가 준비한 밥이 따뜻해
나는 연기처럼 마셔버렸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때와 멀지 않았을 사진 속의 너
떠나가는 사람의 지금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이젠 영원히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겠지
언젠가 마주쳤던 웃는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때는 정말 몰랐었지만 좋은 날들이었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