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시네마 관객운동모임’이라는 곳으로부터 조그만 책자를 하나 받았다. 나만 받은 게 아니고 취재기자들에게 수신인도 딱히 지정하지 않은 채 10권 가까이 무차별 발송되었다. 이제 막 출간된 시집처럼 예뻤다. <씨네21>은 그 모임으로부터 이미 수개월 전 ‘공개질의서’와 ‘법률의견서’를 받은 바 있다. 지난해 <씨네21>의 ‘미투’ 기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명예회복을 목표로 한 것 같은 내용들이었다. 앞서 공개질의서와 법률의견서를 받았을 때도 굳이 답변할 필요가 없었기에 따로 대응을 하지 않았으나, 이미 그 모임의 회원으로 보이는 분들이 책자의 내용을 공개적으로 인터넷상에 일부 게시하였기에 몇자 적으려 한다.
책자 표지에는 ‘2018년 트위터상의 제3자 폭로와 단순동조 트윗이 촉발한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사임 사건의 사이버 인권 침해를 기록하며’라는 긴 제목이 붙어 있는데, 말 그대로 본래 있었던 사건과 별개로 그 이후의 ‘트위터상’으로 한정짓고 있을뿐더러 ‘제3자 구제’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 ‘제3자 폭로’를 문제 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각기 다른 내용의 수많은 트윗들을 ‘단순 동조 트윗’으로 뭉뚱그린 것부터 그 책자는 잘못된 제목을 갖고 태어났다. 특히 소름 끼쳤던 이유는, 본래 발생한 일이 거짓이어서 사임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과잉 처벌’받았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책자 곳곳에 ‘여론재판’ 혹은 (가해자의) ‘인권’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에게 빙의하여, 차마 그들이 대놓고 쓰지 못한 속마음을 대신해서 써보자면 ‘그게 과연 사임까지 할 정도의 일인가?’가 아닌가 싶다.
공개질의서와 법률의견서, 그리고 책자 제작에 이르기까지 마치 팔만대장경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변호사 선임 문의 및 상담, 법률의견서 마련을 위한 ‘모금 운동’ 전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와 <씨네21>에 보낼 공개질의서 초안 마련, 1차 법률자문 회의, 1차 수정안, 질의사항 최종 완료, 그렇게 구체적인 날짜와 함께 정리된 일지를 보면서, 그것이 마치 어마어마한 ‘관객운동’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착시효과를 주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더 큰 문제는, 표지에 제목만 없다면 가해자를 처벌하려는 모임의 책자인지, 가해자의 명예회복을 꿈꾸는 모임의 책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일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이 잘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고마운 책자였다고 해야 할까.
최근, 위의 모임에서 문제 삼은 당시 기사에서 함께 언급된, 마찬가지로 한예종에서 강의를 그만두었던 또 다른 A평론가가 버젓이 모 기관 홈페이지에 영화 글을 기고하는 것도 봤고, 2011년경 성추행 사건으로 한국독립영화협회로부터 제명됐던 모 영화 웹진의 B편집장이 지방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영화 강의를 하고 비평지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후자의 경우 자신의 이름도 바꾼 데다 당시 몸담았던 웹진명을 경력사항에서 뺐기에 동일 인물임을 알아내기 힘들었으나, 과거 프로필 사진을 그대로 쓰고 있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개명까지 한 사람이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사용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참 영화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