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논란이 한창이다. 누구는 암호화폐의 기술적 기반인 블록체인이 미래 경제의 근간이 될 것이라며 암호화폐 시장 전체를 규제하는 것은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격이라고 주장한다. 누구는 수백만명이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드는 현상이 투기광풍이라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암호화폐에 합리적 근거를 부여하려는 쪽과 박탈하려는 쪽보다 내 귀에 더 박히는 것은 “오죽 절박했으면 젊은이들이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겠냐”는 탄식이다. 블록체인이 미래 경제의 기반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지만 젊은이들이 직면한 당장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장기적 전망이다. 암호화폐 열기를 투기광풍으로 파악하고 규제를 역설하는 쪽은 눈높이가 어긋나 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진입장벽이 낮고 수익률이 높은 암호화폐를 구매하는 것은 리스크가 높더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젊은 세대가 노동의 가치를 저버렸다”는 도적적 비난은 오히려 비도덕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노동의 가치를 저버리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던가? 부동산과 주식으로 재산을 증식하고 수입을 올리는 게 상식인 사회, 불로소득이 비정상적 투기가 아니라 정상적 투자인 사회에서 불안과 자괴감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암호화폐라는 출구는 지극히 도덕적인 선택이 아닌가?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앞가림하는 어엿한 자식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합리와 비합리가 뒤바뀌고 도덕과 비도덕이 뒤바뀌는 이러한 전도야말로 ‘헬조선’의 적나라한 풍경이다. 그런데 과연 이 살풍경 속에 젊은이들만 있을까? 인터넷과 컴퓨터 조작에 익숙해진다면 노인들이라고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 직전 어느 날, 은행 창구에서 직원과 노인 한분이 나눈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다. 노인은 주식 상품이 만기됐다고 연장을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며 직원에게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곧이어 닥칠 주식시장 붕괴를 알 리 없던 직원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고객님, 안전한 상품이니까 염려 마세요. 앞으로 주가가 떨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어떤 얼굴이 더 광적일까? “염려 마세요”라 말하는 친절한 얼굴? 아니면 “가즈아”를 외치는 절박한 얼굴? 한국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체계적이고 노골적으로 방기해온 지는 이미 오래다. 성공은 이제 노동의 정반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결정적인 기회 포착에 달렸다고 여겨진다. 결국 암호화폐 열풍은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집합적으로 학습되어온 생존 및 성공 전략의 일면일 뿐이다. 암호화폐에 대해 젊은 세대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한 트위터리언의 새해 인사가 언급됐다. “트친분들 노력 없이 큰 결실 얻으시길 바랍니다.” 수만건이 리트윗된 이 말은 지긋지긋한 노력은 그만하고 싶지만 성공은 포기할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갈망을 위트 있게 표현한다.
우리는 중산층 진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중산층 이하라고 밝힌 한 친구가 말했다. “열심히 살고 싶지만 계층 상승을 인생 목표로 삼긴 싫어요.” 그 친구의 소망에 대해, 그 소망이 다양한 나무의 모습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널리 줄기를 뻗는 사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일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와 반대편에 있는 사회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