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경제학 책을 읽다보면 과거엔 전문가와 예술가가 동일한 범주로 분류됐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애덤 스미스는 군인, 의사, 변호사, 음악가를 “비생산적 노동자”라 통칭했다. 그들의 노동은 다른 생산적 노동과 달리 한번 사용되면 사라져 새로운 가치를 추가하지 않기에 국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불온한 철학사전>의 ‘시인’ 편에서 이렇게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는 변호사가 될지, 의사가 될지, 신학자가 될지, 시인이 될지 심사숙고한다. 사람의 재산, 건강, 영혼, 쾌락 중 어느 것을 보살피는 일을 할지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 서양에서 시인은 여러 직업적 옵션 중 하나로 취급된 것 같다. 의사가 된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이 된 사람은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볼테르에 따르면 둘은 같은 고용주(교황)에 전속 계약돼 다른 종류의 비생산적 서비스(시중)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시인이 될 것이냐, 의사가 될 것이냐, 변호사가 될 것이냐 하는 심사숙고는 사라졌다. “의대”와 “예대”를 고민하다 예대에 입학했다는 젊은이를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만에 하나 만나더라도 겉으로는 “용기가 대단해요”라면서도 속으로는 ‘미쳤나봐, 왜 그랬어, 쯧쯧’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전문가와 예술가는 고전 경제학적 의미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라 하기도 어렵다. 변호사들은 구조조정, 인수·합병(M&A), 지적재산권이라는 새로운 이윤의 마술을 구사하고, 의사들은 대기업화된 병원에서 실적을 올리고, 작가들은 대형서점의 마케팅 이벤트에 참여하고 방송 출연으로 시청률을 높인다.
그럼에도 전문가와 예술가는 동일한 경제적 범주로 묶기 어렵다. 최근 ‘문재인 케어’에 반대하는 중소병원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보여주듯 의사들은 이제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과 지속 가능성을 ‘투자 대비 회수’에 비추어 따져야 하는 경제적 행위자가 되었다. 경제적 셈법의 값이 비슷한 의사들은 공동 대응을 통해 자신의 서비스를 수호하려 한다. 개인 창작을 하는 다수 예술가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겐 표준적인 생산비용이나 고정적인 인건비가 없다. 예술가는 일종의 1인 자영업자이지만 창작의 질과 지속 가능성은 작품의 제작비와 판매 수입을 넘어서는 비표준적이고 비고정적인 요인들- 학습, 연습, 창작 과정, 심리 상태, 재산 상태, 인맥, 부수입 등- 을 통해 결정된다.
다른 전문 분야와 달리 예술가 집단 전체에 체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규제나 개입도 거의 없다(검열은 빼고). 정부 정책이나 기업 거래의 공정성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어제까지 정부와 기업을 향해 불만을 제기한 예술가가 오늘은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예술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따라서 공통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는 예술가들의 집단행동은 근본적으로 어렵다. 현대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예술가들은 대책 없는 군상이다. 예술가와 비슷한 처지였던 의사와 변호사는 비생산적 노동자에서 경영인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예술가들은 단순한 경제적 셈법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예술가들은 점점 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예술가들을 보고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을 것이다. 실은 예술가들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이러고 사는 거지?” 하지만 그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니 차라리 새로운 작업에 또다시 매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