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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익의 <중경삼림> 계속 울기만 할 거야?

감독 왕가위 / 출연 임청하, 양조위, 금성무 / 제작연도 1994년

나의 20대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도 잡을 수 없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순탄하지 않았다. 계속 도망만 다녔던것 같다. 처음엔 무작정 휴학을 했고, 그다음엔 영장을 받자마자 군대를 갔다. 그리고 고시공부를 핑계로 또다시 휴학을 하고,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는 어학연수를 핑계로 아예 한국을 떠나버렸었다. 세상은 내게 너무도 혼란스러웠고 난 언제나 도망치고 있었다. 실은 도망다닌 것이 아니라 답을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쯤 영화 <중경삼림>을 만났다.

유통기한이 다 된 통조림을 꾸역꾸역 먹어치우던 금성무. 마릴린 먼로 스타일의 금발 가발에 레인코트 그리고 까만 선글라스를 쓴 임청하. 그녀가 가발을 벗어던지던 순간 화면을 정지시킬 듯 빛나던 그녀의 날카로운 검은 머리. 양조위의 새하얀 러닝과 팬티 그리고 끊임없이 피워대던 담배. 양조위를 짝사랑하던 쇼트커트의 여배우. 그녀가 늘 어깨를 들썩이며 듣던 <California Dreaming>. 마치 정지된 것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주인공들 사이로 네온사인 불빛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타인들의 시간들.

“실연당했을 때 난 조깅을 한다. 그럼 수분이 다 빠져나가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난 그 기간을 만년으로 적고 싶다.” “외출할 때면 늘 레인코트와 선글라스를 쓴다. 언제 비가 올지 언제 태양이 빛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본 지 20년이 지난 <중경삼림>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도 스토리가 아니라 강렬했던 이미지와 이런 대사들 때문이겠지.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명대사들만 모아놓은 페이지들이 꽤 많다. 하지만 실연당한 양조위와 젖은 수건과의 대화는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젖은 수건을 짜면서 “그만 울어. 계속 울기만 할 거야? 강해져야지”라고 말하는 그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또한 가슴 한켠을 아리게 했다.

<중경삼림>의 그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은 이정표를 찾지 못한 내 삶의 그림자처럼 나에게 스며들었고, 영화의 주인공들은 단 한번도 위로의 말을 던지지 않았지만 난 분명 위로받았다. 나 혼자 혼란스러운 건 아니라고, 나 혼자 외로운 건 아니라고, 나 혼자 그렇게 막막한 건 아니라고.

청춘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 순간을 사는 이들에게 그 시간은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에 혼자 버려진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다보면 살아진다.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은 없고 막막한 삶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또 다른 긍정이 되기도 한다. 의미 없이 스쳐간 인연이 어느 날 가장 소중한 사랑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일탈은 삶의 유의미한 경험과 자산이 되기도 한다. 사실 청춘만 막막한 것은 아니다. 나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그 막막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받아들일 뿐이다. 혼란스럽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아주 확실한 증거다.

장경익 스튜디오앤뉴 대표. 창립작 <안시성>(감독 김광식)을 제작 중이다. NEW 영화사업부 시절, <변호인>(2013), <부산행>(2016),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등의 투자와 배급을 맡았고, NEW 영화사업부 대표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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