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속 미식 장면들
얼마 전 일본에서 <구루메 만화의 역사>란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루메는 프랑스 말 ‘Gourmet’의 일본어 발음으로 미식가란 뜻이다. ‘구루메 만화’를 우리말로 옮기자면 ‘요리만화’ 정도가 될 것이다. 아직 한국에 정식발매되지 않았으니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일본 요리만화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흥미진진한 책일 거라 짐작한다.
내가 처음 일본 요리만화를 본 것은 70년대 중반 <소년 점프>에서였다. 초밥요리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는데, 그 당시 초밥은 커녕 생선회도 구경을 못한 나로서는 그 만화를 건성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었던 80년대 초. 만홧가게에서 무척 재미있는 만화를 보았는데 무협극화를 주로 그렸던 이재학이 그린, 무림의 고수가 주인공이 아닌 중원의 요리 고수들이 주인공인 만화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주인공이 주방장의 자리를 놓고 대결을 하는데, 그가 잉어를 회로 뜬 후 연못에 놓아주자 잉어가 살아있을 때의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고 숨이 붙어 4~5m를 헤엄쳐가다가 살점이 물에 흩어지는 장면이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이재학의 만화가 한국 요리만화로는 처음 본 것이었다. 2000년대에는 <식객>과 <맛의 달인>을 시작으로 요리만화를 액션만화만큼 많이 보게 되었다. 임협요리만화라 부를 만한 새로운 장르의 만화를 그린 쓰지야마 시게루의 푸드 파이터들의 대결 이야기 <먹짱>,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음식 이야기로 대결을 벌이는 <대결! 궁극의 맛>을 보면서 일본의 요리만화는 거미줄처럼 이야기를 넓혀 간다는 생각을 했다. ‘푸하하!’ 웃으면서 ‘세상에 이젠 이런 만화까지!’ 했던 것이 게임 속 던전의 세계에서 괴물들을 사냥하여 요리해 먹는 구이 로코의 <던전밥>이었고, 일본 제국 군인들의 군대 짬밥 만화 <메시아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굉장하다고 감탄했다. 멍청한 어른 남자주인공과 현명하고 프로페셔널한 소녀 주인공의 조합에 북해도 아이누족의 음식, 그리고 황금에 눈이 먼 악당들의 총집합이라는 매력적인 만화 <골든 카무이>를 보고 ‘이제 모든 만화에 미식 장면이 없으면 안 되는구나’하고 중얼거렸다.
혼자서 우아하게 한잔
술을 못 마시는 중년 남자가 주인공인 요리만화가 <고독한 미식가>라면, 술을 좋아하는 20대 여자가 주인공인 만화가 <와카코와 술>이다. <고독한 미식가>가 찌개와 장아찌 같은 일본 서민들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주인공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면, <와카코와 술>은 일본 서민들이 주로 찾는 술집의 수수한 안주와 술을 맛있게 먹는 여주인공이 눈길을 사로잡는 만화이다. 이 만화들 저 건너편에 독신 샐러리맨 남성이 종횡무진 술과 안주를 찾아다니는 만화 <술 한잔 인생 한입>이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항상 유쾌하고 발랄하여 약간의 조증이 의심되는데 그는 항상 술친구들을 동반하여 고주망태가 되어 끝장을 보고야 만다. 하지만 <와카코와 술>는 일본 소주를 미즈와리로 마시는 것처럼 옅고 은은한 울증의 만화다.
<술꾼 도시 처녀들>의 주인공은 여자들이지만 그들은 주당들로 항상 왁자지껄 박력이 넘치는 음주 생활을 한다. <와카코와 술>의 주인공 와카코는 항상 혼자서 술을 마신다. 한 가지 안주와 잔술 한잔을 한 시간 정도 맛있게 먹고는 술잔과 안주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면 미련 없이 벌떡 일어나 술집을 표표히 떠난다.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주인공 이와마 소다츠와 비슷한 유형의 술꾼인 나는 점심식사 시간에 혼자 해장굿집이나 냉면집에서 소주 한병을 시켜서 술을 반찬처럼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 저녁때 술꾼들이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술집에서 혼자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마신 일은 거의 없다. 등을 보이고 혼자 술을 먹는다는 것이 가지와라 잇키 같은 흉폭한 무뢰한이 연상되어서인지도 모르겠고, 어려서부터 혼자 술을 마시는 아저씨들의 추레한 모습을 질리도록 많이 봐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와카코가 혼자서 술을 마시는 방식을 보면 나도 저렇게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 문을 나서면 와카코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저녁식사를 대신할 술집 순례에 나선다.
오늘은 비가 오니, 오늘은 눈이 내리니, 하면서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술집 거리를 총총히 걷다가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안주 냄새나 그날의 메뉴가 적힌 간판을 보고 마음이 동하면 술집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 혼자 술집에 들어갔을 때 추근거릴 남성이라는 장애물들은 이 만화의 첫회에서 단호하게 싹을 잘라버린다. 첫회에서 와카코는 혼자 술집에 들어가 앉아서 술과 안주를 시킨다. 딱 한잔의 술과 그에 적당한 안주 한 접시다. 잠시 후 젊은 남자 회사원들이 와카코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가 맛있게 먹는 안주를 보고는 자신들도 같은 것을 시키며 와카코를 힐끔거린다. 집적거림이 시작될 것 같은 찰나, 만화를 그린 신큐 지에는 주인공 와카코에게 술, 안주, 나라는 삼위일체의 정신 상태라는 장벽을 완벽하게 쳐놓는다. “나는 혼자가 즐거우니 방해 말고, 너희들 술이나 얌전히 마셔라”라고 준엄하게 타이르는 후광이 와카코의 머리 위에서 빛난다. 첫회 이후, 와카코의 술과 안주의 편력은 거칠 것이 없다. 간혹 잘생긴 주방장에게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오로지 와카코와 술, 그리고 안주를 음미하고 그 완성으로 그가 내뱉는 감탄사 “푸슈”가 있을 뿐이다.
꽁치를 완벽하게 발라먹는 법
한회에 한 종류의 술과 안주, 술집이 등장하는 단막극 형식의 이 만화에서 가장 공감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와카코가 자리에 앉아 늦여름이 제철인 물오른 꽁치 소금구이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와카코는 꽁치의 등껍질을 살짝 벗겨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속살을 한점 떼어서 벗겨놓은 껍질과 함께 입에 넣는다. 입을 오물거려 잔뼈를 골라 접시 끄트머리에 올려놓고 차갑게 식힌 소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고는! 젓가락을 높이 들어올려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바로 내장을 향해 내리꽂는다. 꽁치 배에 젓가락을 넣고 헤집어 배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를 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입에 넣는다. ‘짜지만 쌉쌀한 이 비릿한 맛!’을 느끼고는 “푸슈” 소리를 낸다. 와카코는 옆자리의 남자가 꽁치 내장을 발라내서 그릇 한편으로 밀어놓은 것을 보고는 내장을 남기는 사람을 보면 좀 아깝다고 생각하며 꽁치를 등뼈와 대가리만 남기고 모두 먹고는 씩 웃는다.
와카코는 깨끗하게 살과 내장을 발라내 먹은 꽁치 접시를 보며 술잔에 남은 술을 다 마시면서 “어른이 됐나봐”라고 중얼거린다. 이렇게 꽁치를 대가리와 뼈만 남기고 알뜰하게 먹는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선구이를 안주로 해 여럿이서 술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술꾼들은 잘 알 것이다. 나는 언제 와카코처럼 혼자 우아하게 술을 마실 수 있을까? 아마 난 안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