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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카포티>와 <인퍼머스> 그리고 <인 콜드 블러드>
박수민(영화감독) 2017-06-08

<인퍼머스>

1959년 미국 캔자스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농장주 일가족 4명이 엽총에 맞아 살해당한다. 이 학살로 범인(들)이 가져간 것은 망원경과 라디오, 그리고 50달러가 채 안 되는 돈과 1달러짜리 은동전 하나가 전부였다. 당대의 알려진 소설가이자 할리우드 시나리오작가이고 뉴욕 사교계의 셀러브리티였던 트루먼 카포티는 신문에서 사건에 대한 짤막한 박스 기사를 읽자마자 커다란 영감을 떠올리고, 오랜 친구였던 넬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의 저자)와 함께 홀컴으로 간다. 취재 도중에 범인이 붙잡히고, 딕 히콕과 페리 스미스, 두 떠돌이(Drifter)를 만나는 순간 카포티의 영감은 뚜렷한 확신으로 변한다. 특히 페리라는 존재와, 가난과 고통이 잠식한 그의 불행한 삶은 카포티에겐 ‘금광’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한 단어도 쓰지 않았지만, 이건 엄청난 대작이 될 거야. 겉으론 소설과 똑같지만 그 안에 담긴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진실이라는 게 다르지.” 1966년 카포티는 자신의 호언장담대로 마침내 책을 써낸다. ‘논픽션 노블’이란 역설적인 장르를 탄생시킨 르포르타주의 걸작, <인 콜드 블러드>가 그것이다.

다큐멘터리로 이름을 알린 베넷 밀러의 첫 장편 <카포티>(2005)는 바로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명성 덕분에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어서 카포티의 단편 전집 <차가운 벽>과 나머지 장편소설도 선집의 형태로 출간됐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의 원작자로만 알았던 카포티가 이 시점에서부터 한국 독자들에게 뒤늦게 문학으로 소개되었다. 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보다 영화가 그려낸 개인으로 먼저 보여진 셈이다.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관객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홀릴 듯 연기하는 인물의 캐리커처를 ‘카포티’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작금의 흥행과 명성을 확인하는 일에 게으른 관객인 나는 <인 콜드 블러드>를 읽고 난 다음에야 영화 <카포티>를 본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약 책보다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작품과 작가에 대한 감흥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영화가 규정한 이미지가 독서를 방해할 테니까.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영화를 볼 때면 먼저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경우는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영화는 관객에게 최소한의 앎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읽은 <인 콜드 블러드> 책 자체는 의심할 여지없는 걸작이었다. 한 사건의 시작과 끝, 사회와 공동체에 미친 영향, 끔찍한 범죄의 징후와 결과, 우연과 필연을 이토록 집요하게 따라가서 그 과정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전하려 애쓰는 책은 드물다. 제목은 ‘냉혈한’이지만 작품과 문장에 서린 작가의 어떤 의지는 굉장히 뜨겁고 또한 슬픈 것이었다.

문제는 책을 쓴 트루먼 카포티가 의심할 여지가 많은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94%’ 정확하다는 자신의 기억력을 믿어 취재 인터뷰 중 노트나 녹취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듣고 본 것을 머릿속에 넣어 와서 자신의 문학적 기교와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살인자 페리 스미스를 동정적으로 묘사한 이유가 그와 실제로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란 소문도 있었다. 영화 <카포티>에서 카포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넬(캐서린 키너)에게 그의 연인 잭 던피(브루스 그린우드)가 자신과 페리 사이를 의심한다며 “한 인간을 이용하는 것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묻는다. 그러나 이기주의자들은 그렇게 사랑한다. 책이 성공했을 때 대중 앞에서 할 말까지 미리 준비했던 카포티는 페리가 결국 목이 매달려야만 그의 걸작이 완성됨을 잘 알고 있었다.

<인 콜드 블러드>

베넷 밀러의 작품 다음해에 나온, 같은 내용을 다뤘지만 잊히고만 영화, 더글러스 맥그래스의 <인퍼머스>에선 실제 카포티의 말년 모습을 빼닮은 토비 존스가 연기하는 극중 카포티의 이중성이 더욱 노골적이다. “친절함(Tender)과 잔악함(Terrible)을 동시에 지닌” 카포티는 페리가 마침내 고백하는 살인 당시의 감정(“클러터씨는 정말 좋은 신사 분 같았어. 그 사람 목을 그어버리는 순간까진 그렇게 생각했어”)을 진실한 태도로 경청하고 돌아와 그 내용을 사교계 친구들에게 떠벌린다. 단어의 배열에 따라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 체크하고는 자신의 책에 쓰기에 가장 효과적인 문장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카포티>에선 카포티와 페리(클리프튼 콜린스 Jr.)의 관계를 애정보다는 호프먼의 유명한 대사, “우린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나는 앞문으로 나갔고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아”를 통해 서로간의 동질감, 우정에 더 가까운 것처럼 남겨두지만, <인퍼머스>에서는 페리(대니얼 크레이그)가 카포티를 강간하려다 멈춘다. 이 영화에서 페리가 카포티를 가리키는 표현 “내 친구”는 둘의 키스 이후 분명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두 영화의 방향성이 다르기에, 각각 나름의 미덕이 있다.

페리가 처형되기 전에 유가족들에게 “사죄한다”고 말했다는 책의 내용도 두 영화의 해석이 다르다. <카포티>에서 페리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컷이 점프한다. 카포티는 페리의 죽음을 지켜본다. <인퍼머스>에서 카포티는 페리에게 “사죄한다고 말해, 그래야 네 인간성이 회복돼”라고 부탁하지만 그의 죽음을 차마 보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페리가 죽기 전에 뭐라고 했는지는 이후 카포티의 말과 형사 듀이의 증언이 서로 다르다. <인퍼머스>는 영화 중간마다 카포티의 주변인들 증언을 넣어 그에 대한 입체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하지만 <카포티>의 캐릭터를 향한 서늘한 태도에 비교하면 인물의 깊이에서 오히려 평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실제 카포티는 <인퍼머스>에서처럼 이기적이고 이중적이고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영화적 카포티는 호프먼이 연기한 카포티가 더 기억에 남는다. 호프먼은 실제 카포티는 결코 울지 않았을 것이라고 봤지만 연기 중 순간적으로 진실한 감정에 도달하자 눈물을 보였고, 베넷 밀러는 그 컷을 선택했다. 여기서 픽션과 논픽션의, 거짓과 진실의, 그래서 영화의 무서움이 있다. 관객은 영화의 그럴듯한 거짓을 세상의 진실보다 선호한다.

우디 앨런의 <애니 홀>(1977)에서 연인이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흉보는 장면이 있다. “저기 트루먼 카포티 닮은꼴 콘테스트 수상자가 지나가는군.” 다이앤 키튼이 큭큭 웃는다. 우디 앨런이 가리킨 작달막한 남자는 정말로 트루먼 카포티 본인이었다. 미국의 대중에게 카포티는 오랫동안 그의 독특한 목소리와 제스처, 패션, 일찍이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한 사람에 대한 어떤 편견 등이 합하여 굳어진 일종의 아이콘으로, 가십거리로 더 많이 기억된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인 콜드 블러드>로 돌아오면 작가가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영혼을 팔든 어쨌든, 결국 그 영혼의 대부분은 작품에 남는다고 믿고 싶다. <카포티>나 <인퍼머스>는 카포티의 영혼에 관한 6%에 지나지 않고, 그의 94%는 아마도 이 책 <인 콜드 블러드>에 있다고.

책에서 어째선지 내 마음을 움직인 부분이었고, 원작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영화로 옮긴 리처드 브룩스의 <인 콜드 블러드>(1967)에서도 빼먹지 않고 넣은 장면이 있다. 바다에 잠겨 있다는 스페인 금화를 찾자는 허황된 꿈으로 멕시코에 갔던 페리와 딕은 다시 처참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히치하이킹을 하는 소년과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딕은 무시하려 하지만 페리는 그들을 차에 태운다. 소년은 사막 곳곳에 버려진 콜라병을 주워 3센트에 팔 수 있다며 차를 천천히 몰고 갈 것을 부탁하고, 페리와 딕도 어느새 동참하여 정신없이 빈 병을 줍는다.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이야말로 그들 삶에서 허락된 보물찾기였다. 두 죄인에게 느닷없이 다정한 순간이 지나간다. 뒷좌석 가득 병을 모았고 모텔에 들러 돈을 바꾸니 무려 12달러60센트였다. 소년은 두 남자에게 돈을 똑같이 나누어준다.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죄인들이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한참 동안 손을 흔든다. 카포티가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는 마지막 작품 앞에 적은 “응답받지 못한 기도보다 응답받은 기도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라는 글귀와 함께,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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