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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비디오가게를 지나야 출구
김혜리 2016-03-10

<무스탕: 랄리의 여름>

<무스탕: 랄리의 여름>의 주인공인 터키 바닷가 시골의 다섯 자매는 어느 날 남자아이들과 물놀이를 했다는 죄목으로 집에 갇혀 신부수업을 받고 집안 어른이 정한 중매결혼을 차례차례 강요받는다. 그러나 분방한 소녀들의 정신은 반동(反動)을 멈추지 않는다. 어린 동물들처럼 한데 엉켜 기운을 나누고 호시탐탐 탈주를 꾀한다. 감독은 도입부부터 랄리와 언니들의 모습을 가둘 수 없는 자연의 포스처럼 묘사한다. 좋아하는 교사의 전근으로 울음을 터뜨린 막내를 끌고 언니들은 흑해로 달려간다. 헝클어진 머리와 비쳐 보이는 속옷 따위 아랑곳없이 깔깔대고 몸을 부대끼는 동안 눈물은 날아가버린다.

02/13

주간지는 1년에 두번 명절을 틈타 휴간한다. 긁어 부스럼이 될까봐 평소 엄두를 내지 못하는 컴퓨터 디스크 폴더와 수납장 정리의 기회다. 이번 연휴에도 선반 몇칸을 차지하고 있는 VHS테이프들을 죄다 끌어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도로 집어넣었다. 개중에는 DVD와 블루레이로 출시된 작품도 있지만, 걸작도 흥행작도 아닌 애매한 그룹에 속해 오히려 구하기 힘들어진 영화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영화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시절을 담고 있다. 비디오로 처음 보거나 반복 감상했던 이 영화들의 이미지는 화면의 주사선까지 포함해야 내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계륵이 돼버린 비디오테이프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동네 대여점의 추억을 되살렸다. 비디오숍은 동네의 ‘핫 플레이스’였다. 엑셀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 주인장은 특정 영화가 어디 꽂혀 있는지 장르별로 구분된 선반의 위치로 기억했고 취향을 파악한 단골들에게 맞춤한 출시작을 추천했다. 재미없으면 물어준다는 호언장담을 곁들여서. 비디오를 뽑아들고 망설이고 있으면 먼저 본 손님이나 동네에서 영화 좀 본다는 언니, 오빠가 촌평을 제공하기도 했다. 나 역시 구력이 쌓이다보니 주인이 못 찾는 영화를 단골의 눈썰미로 찾아주고는 으쓱해진 날도 있었고, 좋아하는 영화가 구작으로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포스터를 얻어오기도 했다. 당시 어머니는 B급 액션영화를 탐식하는 장르 종결자였는데 덕분에 ‘분노’, ‘저격’, ‘추적’ 같은 단어를 포함한 어슷비슷한 제목의 영화를 신작으로 착각해 다시 빌리는 실수도 비일비재했다. “다시 봐도 재미있네. 역시 잘 만들었어. 빨리 끝까지 보고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자.” 그런 날이면 우리는 모녀사기단(?)이 되었다. 대여점 카운터에서는 세대의 까만 리와인더가 고객들이 ‘감사합니다’ 자막까지 보고 멈춘 테이프들을 불철주야 되감고 있었는데, 차르륵거리는 소음이 왠지 우주의 태엽을 감는 소리처럼 들려 마음이 평온해졌다(결국은 비디오 헤드의 마모가 신경 쓰여 가정용 리와인더까지 장만했는데 이 물건은 벌써 오래전에 처분했다). 표준 대여료는 편당 2500원이었지만 우리 가족을 포함한 대부분의 고객들은 1만원을 예치하고 다섯편을 빌리는 제도를 활용했다. 다섯편쯤이야 주말 한나절이면 후딱 소화할 수 있었다. 대여점 연체료만큼 본의 아닌 ‘시네필’들을 양산한 제도는 없지 않을까? 기한을 넘기지 않으려는 의지로 고도로 집중해서 영화를 보았고, 반납하러 간 김에 다음 다섯편을 빌려오는 사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식구들이 서로의 취향 차이를 무릅쓰고 거실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일도 잦았던 시절이다. 여러모로 무척 번거롭고 부지런한 나날이었다. 비디오 반납 시한과 연체료의 압박이 사라진 지금은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영화를 디스크 안에 묵혀두고, 산만하게 나눠서 보기도 한다. 과거엔 꿈도 못 꾸었던 사치와 게으름이다. 비디오로 영화 보느라 수없이 오갔던 골목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회상하고 보니, 그 시절 본 나쁜 화질의 영화들을 한층 선명하고 세세히 기억하는 것이 나이 탓만은 아닌 것 같다.

02/17

데드풀(라이언 레이놀즈)은 돌연변이 영재학교의 자비에 교수를 만나러 가자는 엑스맨 친구 콜로수스의 제안에 반문한다. “제임스 맥어보이? 아니면 패트릭 스튜어트?” 울버린의 재생능력과 스파이더맨풍의 슈트에다 가공할 말발을 장착한 데드풀이 존재하는 차원은, 즉 우리가 익히 아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가 지겹게 극장에 걸리는 세계다. 그러니까 논리상으로 데드풀을 다른 마블 히어로들이 활약하는 평행우주에 합류시키려면 포털을 하나 뚫어야 한다(객석을 향해 직접 말을 걸어 제4의 벽도 무너뜨렸으니 속편의 작가들이 차원깨나 정리하려면 골머리깨나 앓을 법하다). 하지만 폭스와 디즈니의 마블 캐릭터 판권 분점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속편에서 데드풀이 히어로 조직의 외곽을 돌며 조롱하는 특권을 버리고 팀플레이를 해서 얻을 이득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 무책임한 코멘터리를 남발하는 아웃사이더의 특권이야말로 <데드풀> 프랜차이즈의 거의 유일한 존립 근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데드풀>은 오늘날 슈퍼히어로영화의 표준으로 정착한 마블 스튜디오 가족 관람가 블록버스터에 대한 R등급 안티테제로서 재미있다. 어벤져스나 엑스맨이 영웅으로서 책임을 각성하고 히어로끼리 에고를 타협해 협력함으로써 전 지구적 위기를 타개해나간다면 데드풀은 자기를 고문하고 얼굴을 망쳐놓은 적에게 복수하겠다는 사적인 동기로 폭주한다. 청소년 관람가 슈퍼히어로들이 할 수 없는 욕을 하고 자위 행위를 하는 모습도 슬쩍 보여준다. 안티테제로서의 속성을 제하면 <데드풀>의 실체는 빈약한 편이다. 해결사 웨이드 윌슨이 불사의 데드풀로 변신한 사연은 기원 스토리로서 참신할 게 없고 구조를 추려보면 두개의 액션 세트 피스와 플래시백이 전부다. 이만큼 플롯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는 영화도 드물다. 데드풀이 보유한 슈퍼파워의 크기와 범위도 영화상으로는 아직 불분명하고 액션의 개성도 스타일보다 유혈 수위에 있다. <데드풀>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영국인 악당’, ‘섹시한 여자’, ‘CG 캐릭터’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배역과 배우 이름 자리에 넣어 기존 슈퍼히어로영화의 상투성을 놀리는 동시에, “그렇다고 내가 더 잘났다는 건 아님. 비슷한 영화를 지금부터 볼 것임”이라고 영리하게 발뺌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먼저 나온 영화들이 억울할 만하다. 21세기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 중 어떤 영화도 <데드풀>만큼 대놓고 뻔한 영국 출신 악당, CGI 액션, 남자주인공의 필요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를 구사한 예는 떠올리기 어렵다. 예컨대 <데드풀>의 바네사(모레나 바카린)는 웨이드와 불꽃을 튀기는 맞수로 영화에 입장하지만 결국 남자주인공에게 행복을 주고 목표를 부여하는 기능 외에 주체적인 동기나 목적은 전무하며 우연히도 직장은 스트립클럽이다. <데드풀>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장르의 평균을 실제보다 낮추어 잡아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교묘한 알리바이이기도 한 셈이다. 떡을 갖고 있는 동시에 먹어치우기도 하는 영화랄까? 그나저나 <데드풀>을 보다 진심으로 감탄한 한 가지가 있다. 데드풀의 마스크는 가려진 얼굴의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특히 가면의 눈이 감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크기와 모양을 바꾸고, 입이 막혀 있는데도 스피커가 내장된 양 독설이 또박또박 들리는 나 몰라라식 설정이 데드풀답고 유쾌하다. 어차피 코믹스 우주인데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02/18

<스포트라이트>는 명실상부한 ‘토키’영화다. 메모할 보람이 있는 대사가 넘쳐난다. 가톨릭 사제에게 성추행당한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변호사 미첼 가라비디언(스탠리 투치)의 한마디가 특히 뼈저리다. “아이를 기르는 데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고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침묵과 방조의 카르텔이 타격해야 할 진짜 표적임을 절감하게 만드는 말이다. 누구 하나 두드러지지 않는 철저한 앙상블로 인물을 배치하고, 너트와 볼트를 맞춰가며 점진적으로 이야기를 밀어가는 <스포트라이트>의 작법도 미첼의 대사와 멋지게 호응한다. 실질적으로 저널리즘이 사회적 문제를 취재하고 공공의 논의에 회부하는 과제를 완수하는 데에는 영웅의 활약이 별무소용이다. 끈질긴 기다림과 탐문, 반박 불가한 리포트와 올바른 타이밍이 아귀를 맞춰야 일이 성사된다. 이야기가 다루는 제재의 본성과 영화의 형식적 톤을 밀착시켰다는 점이 <스포트라이트>를 견고한 관람 체험으로 만든다. 예컨대 교회 성추행을 <보스턴 글로브> 탐사 취재팀에 이슈로 제시한 신임 보도국장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의 퍼스낼리티는 마치 <스포트라이트> 전체의 의인화 같다. 타지에서 막 부임해 입지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마티 배런은 사교적으로 아첨하지 않는다. “나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의사만 전달되면 족하다”는 입장을, 보도국 내부자에게도 권력 있는 취재원에게도 견지한다. 톰 매카시 감독의 태도도 비슷하다. “이 영화를 좋아해줄 필요는 없다. 사태가 정확히 전해지면 성공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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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트

<사울의 아들>은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1985)가 ‘선포’한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성을 다시 숙고하고 거기에 도전한다. 라슬로 네메시 감독의 출발점은, 나치의 실질적 유대인 학살 과정에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강요받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시체 처리반)들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존더코만도들이 남긴 사진과 진술이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외부에 알려 해방 가능성을 높이려는 당장의 필요와 모두 죽임을 당할 경우 증언이 전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펜과 카메라를 잡은 동기였다. 네메시 감독은 주인공 사울 주변에 이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제대로 구도도 못 잡고 숨어서 셔터를 누르는 사람이 있고, 수용소 일지를 쓰다가 협박을 받는 사람도 있다. 역사의 망각을 두려워하고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던 이들의 의지가, 젊은 감독으로 하여금 많은 예술적 위험을 감수하고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 시점으로, 완료 시제가 아닌 현재진행 시제로 홀로코스트를 영화화하겠다는 의지를 밀어붙이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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