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촬영현장의 데이비드 O. 러셀(오른쪽)과 제니퍼 로렌스. 사진제공 이십세기 폭스코리아.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은 언쟁 장면을 쓰고 찍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1:1 갑론을박부터 방 안의 모든 인물이 한마디씩 거들며 삼천포로 빠지는 수습 불가 논쟁까지, 러셀의 영화에서 말싸움은 액션 세트피스를 대신한다. 배우 제니퍼 로렌스와 세 번째로 손잡은 신작 <조이>도 예외는 아니다. 이 작가 겸 감독은 영화 속 대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뭐라고 생각할까? 이메일로 질문을 보냈다. 데이비드 O. 러셀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보내왔다. “영화 속 대화의 제일 중대한 기능은 리듬과 감정(의 구현)입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다시 읽어볼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도 ‘이 대화가 살아 있는가?’입니다.”
02/11
<대니쉬 걸>의 제목이 직접 지칭하는 덴마크 여자는 물론 에디 레디메인이 연기하는 트랜스젠더 릴리일 것이다(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 여부와 무관하게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자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둘이 일치하는 경우를 칭하는 개념은 시스젠더다.-편집자). 그러나 릴리가 성정체성을 찾기까지 그의 아내였고 이후에도 평생 친구로 남은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도 또 다른 타이틀 롤로서 손색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두 사람은 1920년대 코펜하겐 미술 아카데미에서 만나 결혼한, 행복한 화가 부부였다. <대니쉬 걸>의 초반 초점은, 스무해 넘게 남자로 살아온 아이나르가 여성의 자아- 릴리- 를 각성하는 사건이다. 처음에 ‘여장’을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릴리는, 그때까지 줄곧 남자로 살아온 시간이 ‘남장’이었다는 진실을 깨닫고 육체와 행동을 정체성에 합일시키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시나리오와 연출은 점점 남편을 ‘잃어버린’ 게르다쪽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릴리의 갈등과 변화를 주목하며 따라가던 관객은, 중반 이후부터 이야기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릴리가 별다른 설명 없이 성공적인 화가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여자로 살고 싶다. 인정해 달라”는 선언을 동어 반복하는 동안, 게르다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고 감정의 기복을 경험한다. 심지어 영화는 불운한 게르다의 여생을 염려한 나머지 릴리 대신 버팀목이 돼줄 자상한 시스젠더 이성애자 캐릭터 한스(마티아스 쇼에나에츠)를 창조해 투입한다. 영화 말미에 관객은 게르다와 한스 곁에서 릴리를 하늘로 전송한다. 지상에 잠시 강림한 천사를 기리듯이. 결국 트랜스젠더 릴리는 처음부터 지상에 속하지 않는 예외적 존재였던가? 성소수자 관객 및 LGBT영화의 진화에 관심을 가진 관객이, ‘외부자’인 시스젠더 감독과 작가가 만든 <대니쉬 걸>이라는 텍스트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02/12
1920, 30년대 실존 트랜스젠더 여성의 이야기를 주류 영화가 소재로 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니쉬 걸>은 용감한 기획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과물은 톰 후퍼 감독의 전작 <킹스 스피치>, 그리고 에디 레디메인의 오스카 수상작 <사랑에 대한 모든 것>과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대니쉬 걸>은 <킹스 스피치>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실존 인물의 자아발견 과정을 결혼생활을 중심으로 풀어낸 드라마이며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랬듯 부부의 연을 청산한 다음에도 지속된 우정 이야기다. <대니쉬 걸>에서 가장 마음을 흔드는 요소는, 초상화가인 아내 게르다가 생애 최초로 여성의 모습을 찾은 남편을 캔버스에 그림으로써 릴리의 자아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가는 설정이다. 제일 감동적인 장면도 부부가 불화 중인데도 릴리가 무의식적으로 게르다의 손을 찾고 게르다가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주는 순간이다. 어쩌면 톰 후퍼 감독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처음부터 트랜스젠더의 삶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결혼의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 정치적 올바름과 그름을 차치하더라도, 트랜스젠더 인물을 제1 주인공으로 세운 이상 캐릭터의 특수성에 대한 정면대결을 배제하고 ‘일반적으로’ 좋은 영화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대니쉬 걸>은 이 대목에서 주류 감수성 안에 조심스레 웅크리기를 택한다. 초창기 성전환 수술의 끔찍한 위험과 생리적 고통, 릴리와 게르다 부부의 사회적 관계가 봉착했을 잡음과 혼돈은 편의적으로 생략됐다. 우리가 보는 수난의 이미지는 수술 후 담요를 덮고 테라스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쇠약한 릴리와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게르다의 그림 같은 정경이다. 역시 워킹 타이틀 작품인 <사랑에 대한 모든 것>도 호킹 부부의 역사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구질구질한 갈등은 스크린에 보여주지 않았더랬다. 대신 톰 후퍼 감독은 여성복과 장신구에 매료된 릴리의 페티시즘과 ‘여자다운’ 제스처를 정밀 묘사하는 데에 긴 스크린 타임을 할애한다. 물론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20세기 초의 인물 릴리가 관습적으로 여자다운 외형을 갖추는 데에 집착했으리라는 역사주의적 추측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2015년 영화 <대니쉬 걸>의 소극적 해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게르다만 해도 기록대로 재현되지는 않았다). 가장 위험스러워 보이는 부분은 릴리가 파리의 섹스 숍을 찾아가 에로틱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여성들의 동작을 유리창 너머에서 똑같이 흉내내는 모습을 왕복 포커스로 포개어 찍은 장면이다. 성 다수자가 트랜스젠더를 재단하는 편견에 정확히 부합하는 이 이미지는 과잉이다. 한편 <대니쉬 걸>의 미술과 의상에는 극중 인물의 취향 못지않게 제작진의 페티시즘이 드러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물들의 패션은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가구 컬렉션이 모든 실내를 꽉꽉 채운다(특히 여성복에 있어서 워킹 타이틀은 브랜드를 하나 열어도 성공할 법하다). 게르다가 성전환 수술의 선구자인 의사와 상담하러 간 장면에서 관객의 눈은 아르누보풍의 화려한 아치와 난간에 먼저 붙들린다. 요컨대 <대니쉬 걸>을 가리켜 트랜스젠더영화의 코스튬을 입은,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을 위한 로맨스라는 비판이 제기돼도 변호할 근거를 찾기는 상당히 어렵다.
02/13
스튜디오 입장에서 현재 트랜스젠더 여성 캐릭터를 주류 영화의 주역으로 거부감 없이 소화할 스타로 에디 레드메인 이상의 선택은 없을 것이다. 이 배우는 압도적으로 사랑스럽고 화사한 피사체이자 정교하고 성실한 테크니션이다. 레드메인은, 그가 스크린에서 웃으면 관객이 따라서 미소짓고 눈물을 글썽이면 보는 이도 무턱대고 슬퍼지는, 가공할 동화력을 가진 부류의 연기자다. 이 배우는 마치 얇은 창호지 같아서 순식간에 감정이 온몸에 번지고 쉽게 흔들리며 찢어진다. 릴리가 남자의 키스를 받고 갑자기 코피를 터뜨리는 <대니쉬 걸>의 한 장면은 레드메인이 아니었다면 어이없게 과장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반면 이 몰입력이 폭주한 불행한 사례가 <주피터 어센딩>의 과도한 연기다. 레드메인의 단점은 매력과 근원이 같다. 어떤 갈등이나 복잡한 딜레마도 레드메인이 연기하면 아름답고 순진무구한 존재의 일방적 수난처럼 보인다. “왜?”나 “어떻게?”라는 상상과 추론을 부르지 않고 곧장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 그가 연기한 스티븐 호킹과 릴리 엘베는 1mm도 오차 없는 신체 표현으로 관객을 사로잡지만, 두 인물이 내포한 콤플렉스와 어두운 이기심까지 우리를 끌고 들어가지는 못한다. 역설적으로 <대니쉬 걸>의 경우 레드메인의 모델스러운 체격과 미모가 걸림돌이 된다. 그의 릴리는 여장을 한 우수에 찬 이례적 미남이며 신화 속 헤르마프로디토스(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남녀의 육체를 한데 가졌다) 같은 인물이다. 레드메인의 트랜스젠더 연기는 시스젠더 다수자 관객의 감수성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해서 오스카 후보 지명과 별개로 <대니쉬 걸> 개봉 후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에 가해진 영미권 비평가들- 주로 남성- 의 악평은 지나쳐 보인다. 에디 레드메인은 확실히 카메라를 위한 연기를 하는 배우다. 관객이 캐릭터보다 퍼포먼스를 구경하게 만드는 ‘오버 액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열등한 연기자의 징표는 아니다. 예민한 감수성과 지적 해석력, 성실성은 쉽게 변치 않을 확고한 자산이며 깊이의 문제는 이 배우 앞에 창창히 남아 있는 시간과 경험이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졸음에 빠져들던 내 눈을 확 뜨이게 했던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의 곧은 호소력을 잊을 수 없다. 최근 에디 레드메인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감은 혹시 남성배우의 여리고 감상적인 제스처를 불에 덴 듯 남사스러워하는 관성에 기인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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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의 기여
흥미롭게도 앙상블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와 배우는 기획취재팀 외부에 있다. 변호사로 분한 스탠리 투치와 빌리 크루덥, 그리고 외지에서 <보스턴 글로브>로 막 부임한 편집국장 마티 배런 역의 리브 슈라이버이다. 신임 국장 마티 배런은 “독자들에게 제일 필요한 걸 제공해야 한다”라고 입장을 밝혀 예산을 절감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조직 개편을 할 거라는 예측을 낳는다. 그러나 그가 말한 독자의 필요는 진실을 알 권리였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야구에 무관심한 유대인 독신자로, 보스턴 문화의 아웃사이더인 배런은 내부자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지적한다. 국장으로서 특종을 독려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선정주의의 덫을 피해 폐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기사의 쟁점과 공개 시점, 포맷을 조율한다. 기자들의 호감을 사려고 애쓰지 않는 한편 생색도 내지 않는다. 짧은 출연시간에도 불구하고 리브 슈라이버의 연기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존재감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