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룸>은 가로 3m, 세로 3m 남짓한 방으로 관객을 데리고 들어간다. 엄마(브리 라슨)와 다섯살 잭(제이콥 트렘블리)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작은 천창과 TV스크린만이 외부의 빛이 들어오는 틈이다. 코르크로 도배된 벽은 소리를 차단한다. 그러나 방 바깥 세계를 알고 있는 엄마와 ‘룸’에서 태어나 자란 잭이 느끼는 공간은 다르다. 엄마의 숨 막히는 감옥이, 아이에겐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을 품은 놀이터다. 잭은 가구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대화하고 방 자체도 친구인 양 ‘룸’이라고 부른다. 영화의 제목에 관사가 없는 이유다. 모자의 상이한 감각을 반영하듯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앵글과 렌즈를 바꿔가며 공간감에 변화를 준다. 관객이 이 방의 물리적 넓이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시점은 영화가 방을 벗어난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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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섭은낭>의 은낭(隱娘)은 숨어 있는 낭자다. 어릴 적부터 숲속에 즐겨 머물렀던 그녀의 기질이 담긴 이름이다. 자객이 된 그녀(서기)의 고강한 무공도, 압도적인 공격보다 바람처럼 스며들어 은신하는 능력에 있다. 또한 몸을 성공적으로 숨김으로써 확보하는 전망에서 나온다. <자객 섭은낭>의 전투 장면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공간의 형세, 표적의 움직임과 습성을 파악한 은낭은 최대한 짧고 효과적인 동선으로 공격하고, 주고자 한 타격이나 메시지를 남긴 다음 다시 사라진다. 움직임마다 의중이 담긴 은낭의 검술과 동선은, 의미를 담은 글씨인 동시에 조형예술인 동양의 서예 같은 아름다움을 발한다. 단검을 휘두르는 동작과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는 움직임이 한 호흡에 이루어지는 프롤로그 액션은, 붓을 떼는 방식으로 획의 삐침을 완성하는 서도가의 손놀림 같다. 화면에 보이는 구상(具象)과 거기 담긴 추상이 분별되지 않기로는 <자객 섭은낭> 전체가 마찬가지다.
은낭이 스승에게 명받은 암살의 표적이자 과거의 약혼자인 위박의 군주 전계안(장첸)은, 은낭이 흘려놓은 메시지를 알아본다. “죽더라도 누구에게 왜 죽는지 알려주고자 하는군.” 은낭의 예고는 옛 연인을 향한 미련의 발로라기보다 예를 갖추는 행위다. 고수의 자격을 시험당하는 절박한 와중에도 은낭은 예의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섭은낭이라는 무협영웅이 추구하는 길과 맞닿아 있다. <자객 섭은낭>에는 이야기를 움직이는 세 여성이 등장한다. 섭은낭과 스승 가신공주, 그리고 주공 전계안의 야심만만한 본부인 전원씨가 그들이다. 극중에서 이미 죽었지만 모든 인물의 운명을 정초한 가성공주(계안의 어머니)는 가신공주와 동일한 배우가 연기한다. 전원씨 역의 배우는 황금 가면을 쓴 또 한명의 자객 정정아로 일인이역을 했다(전원씨가 실제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지 여부는 명시되지 않는다). 요컨대 이들은 정치인/무인으로서 각자의 이상을 추구한다. 가성공주는 위박에 시집온 당나라 조정의 공주로서 이중적 사명을 완수하려 했고, 속세의 정을 끊은 가신공주는 단독자 킬러로서 소수의 요인을 냉혹히 암살해 정의를 세우려 한다. 애초 망명한 무리의 딸 출신으로 정략결혼한 전원씨에게도 대의가 있을 터다. 독립의 문턱에 선 젊은 은낭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 여성들과는 차별화된 선택에 도달한다. 오욕칠정을 누르고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시험하는 스승에게 은낭은 “죽이지 않는다”는 제3의 결과를 내놓는다. 위박의 조정이 허약해 지금 전계안을 제거하면 백성의 삶이 당분간 대안 없는 도탄에 빠지리라는 판단이, 자객으로서 도약과 명분보다 앞선다. 무인 섭은낭의 새로운 경지는 죽이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열린다. 은낭은 자객, 딸, 연인, 귀족 등 하나의 역할에 매이는 대신 자연과 뭇사람들 속으로 ‘은신’함으로써 도(道)를 이루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스승, 부모, 연인과 있는 동안 한번도 웃지 않았던 은낭은 농가의 가난한 백성들 곁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풀고 미소를 띤다. 거울 가는 마경소년(쓰마부키 사토시)이 은낭의 새로운 반려로 암시되긴 하지만 원작 소설보다 역할이 대폭 축소됐다. 은낭은 칼을 버리고 여염의 아낙이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칼을 그치기 위한 칼을 깊이 품고 백성들과 나란히 걸어간다. 남쪽으로 떠나가는 은낭의 일행을 조심히 뒤따르던 카메라는 인물들이 중경에 진입하면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사람들이 산모퉁이로 사라져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은낭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관객이 거의 처음으로 목도하는 이 숏은 이상한 감격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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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인물을 배웅하는 구도로 찍힌 라스트신은 많다. <자객 섭은낭>의 마지막 숏이 안겨준 이례적인 감흥의 연유를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관객인 나의 일부는, 그 지점까지 이 영화를 귀신영화로서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은낭의 침묵이다. 그녀의 과거사와 감정은 오직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서만 구술된다. 어머니가 은낭이 떠난 사연을 회고하는 장면에서 은낭은 불현듯 얼굴을 천에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지만 흐느낌은 새와 벌레 소리에 묻혀 희미하고 우리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전계안이 애첩 호희에게 은낭과의 사랑을 들려줄 때 숨어 있는 은낭의 반응은 바람에 흔들리는 휘장이 대신한다. 플래시백 속 가신공주는 짝 대신 갖다준 거울을 보고 슬피 울다 죽은 난조의 고사를 들려준다. 난조가 은낭이라면 실연의 고통을 통과한 그녀는 여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의 숏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갭이다. 일단 <자객 섭은낭>에는 인물의 자리와 시선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리버스숏들이 있다. 비단 휘장 뒤에 숨은 은낭이 전계안과 호희를 엿보는 듯한 숏은 그녀가 거기 있다면 들키지 않을 리 없는 시점으로 찍혀 있지만, 동시에 은낭의 존재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녀는 거기 없지만 있다. 물리적 제약을 초월한 마음의 시점숏이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다. 전원씨가 숲속에서 싸우는 은낭을 목격하는 대목도 공간적 연속성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자객 섭은낭>은 숏과 숏뿐만 아니라 장면과 장면, 시퀀스 사이에도 은근한 경공술을 구사한다.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 일행을 도우러 갔던 은낭이 호희를 구하러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미스터리다. <자객 섭은낭>의 인물들이 은낭이 등장하기 직전 종종 느닷없는 잠에 빠지는 모습도, 유령 출몰의 전조처럼 보인다. 요컨대, 마지막 숏에서 내가 느낀 감흥은 사자(死者)의 부활을 기뻐하는 기분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인간과 자연 안에 존재하는 감정의 흐름에 기대어 플롯은 ‘암시’하는 데에 그친다. <자객 섭은낭>에서 보이는 것들 사이의 간격을 채우고, 조각난 시공을 연결해 리얼리티를 환기시키는 요소는 음향이다. <자객 섭은낭>의 음악과 음향은 장면 사이를 바람처럼 불어간다. 신출귀몰하는 은낭을 땅에 붙잡아매기라도 하듯, 해가 뜨고 질 때면 어김없이 시보의 북이 울리고 벌레와 새의 울음, 바람과 수런대는 나무, 타닥거리는 불꽃의 소리가 시간과 공간의 유격을 부드럽게 봉합한다. 배우 서기는 <자객 섭은낭>이 은낭의 시점이 지배하는 영화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다. 하지만 구름이나 나무의 시점보다 중할 것도 없다”고 답한 바 있다. 사운드는 그녀의 대답에 수긍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허우샤오시엔은 저택의 실내를 벽이 아닌 휘장으로 외부와 분리하고 동굴처럼 반쯤 열린 공간을 선택해, 소리를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했다. 실내를 통과하는 바람은 곳곳에 놓인 촛불의 일렁임으로 가시화되고, 시간은 촛농으로 맺혀 결정(結晶)을 만든다. <자객 섭은낭>에서 궁정의 내부는 야외 같고 숲은 실내 같다. 황문영 미술감독의 세트는 담백하다고도 화려하다고도 규정하기 어렵다. 프레임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가구가 아니라 병풍, 휘장, 기둥과 들보 같은 칸막이들이 구획하는 공간의 층이기 때문이다. 원경에서는 시종들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촛불은 프레임을 약동시킨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정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여겨온 관객에게 <자객 섭은낭>은, 영화에서 움직임이 무엇인지 재고하도록 권한다.
Stephen Sampson/ 콜라보레이션 팬아트 포스터(수입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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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크레딧
<데드풀>의 오프닝 크레딧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웃긴 대목 중 하나다. 액션의 정점에 인물을 멈추어놓고 카메라가 유영하는 동안, 크레딧은 캐릭터와 제작진의 이름 대신 ‘핫한 여자’, ‘영국 악당’ ‘CG 캐릭터’ 같은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상투형을 늘어놓는다. 크레딧도 작가가 쓴 만큼 각본가는 ‘진짜 영웅들’로, 감독은 ‘능력보다 과다하게 보수를 받는 도구’로 표기한다. “지금부터 또 비슷한 영화를 볼 거라는 걸 알지 않는가?”라는 투의 이 오프닝 크레딧은, 영화 전체의 포지션을 예고하고 히어로영화의 관객을 가볍게 놀린다. 유튜브의 인기 콘텐츠인 ‘솔직한 예고편’ (honest trailers)을, 메이저영화가 본뜬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데드풀>의 신인감독 팀 밀러가 크레딧에 방점을 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흘러내리는 금속의 이미지와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이 황홀하게 결합한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의 오프닝 크레딧을 기억하는지? 밀러는 그 시퀀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