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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도중(途中)의 집
김혜리 2016-01-14

※<헤이트풀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괴물>

<헤이트풀8>의 오프닝이 존 카펜터 감독의 1982년작 <괴물>(The Thing)을 연상시키는 이유는 세 가지다. 광활한 설원의 스코프와 배우 커트 러셀 그리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서부극보다는 호러의 배음처럼 들리는 이번 음악은 지금까지 팝송 컴필레이션만으로 사운드트랙을 엮어온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최초의 오리지널 스코어이기도 하다. 기억이 희미해 다시 꺼내본 <괴물>은 짐작보다 더 깊이 타란티노의 의식에 촉수를 뻗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눈보라 속에 고립돼 서로의 정체를 의심하는 인물들, 느긋한 듯 긴장된 공동휴게실 풍경, 간헐적인 하드 고어와 마지막 장면의 톤까지 <헤이트풀8>는 <괴물>과 은근슬쩍 평행선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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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 감독 여덟 번째 작품.’ <헤이트풀8>의 웅장한 오프닝에 폼나게 박힌 자막을 보고 흠칫했다. 겨우 여덟편? 열댓편은 족히 된 듯한데? 연출 편수를 훌쩍 넘어서는 타란티노의 존재감은 작가/연출자로서 대체 불가한 스타일 덕분일 것이다. 1992년 데뷔 후 독창적인 대사 작법, 비선형적 서사구조, 유머와 폭력을 비슷한 매너로 구사하는 성향 등이 ‘타란티노에스크’(Tarantino-esque)라는 신종 형용사를 만들어냈다. 결국 그가 각본이나 출연, 제작만 담당한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 <올리버 스톤의 킬러>(1994) 같은 영화까지 범타란티노 영화로 간주되는 효과가 있었다. 첫 영화 <저수지의 개들>(1992)을 시작으로 팝 문화 및 옛날 영화의 인용으로 들끓는 범죄액션영화를 내놓던 타란티노는, 사무라이영화를 총천연색으로 재조립한 <킬 빌>부터 장르 각개격파에 들어갔다. 옴니버스 중 한편인 <데쓰 프루프>를 직접 연출한 <그라인드 하우스>(2007)는 드라이브인 극장 영화를,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 2009)은 할리우드 반나치 전쟁영화와 2차 대전 배경의 코미디를, <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 2012)는 서부극을 소환했다. 그러는 동안 백인 남성 감독인 타란티노는 모욕당하는 여성,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흑인 노예의 복수를 차례차례 자기 영화로 대리 수행했다. 덧붙여 근작 <바스터즈>와 <장고>에서 타란티노는 역사를 소재로 택해 치기와 유희정신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필모그래피로부터 전환을 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장고>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타란티노는, 할리우드가 외면해온 노예제의 실상을 드디어 스크린에 끌어냈다며 자기 영화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자부심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두 시대극이 타란티노의 비약적 성장이라고 선뜻 동조할 수 없었다. <바스터즈>와 <장고>는, 모욕당한 여자들이 마초 폭주족을 때려눕히는 쾌감에 집중한 중편 <데쓰 프루프>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두 영화는 절대 악당의 자리에 히틀러와 악덕 노예 소유주를 데려다놓고 불살라버린다. 그러나 영화를 소원 풀이로 대안적 역사로 만들어 악을 응징하고 엄연히 존재한 사태를 지워버림으로써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극장 밖 세계와는 무관하게 느껴졌다. 야박하게 표현하자면 <바스터즈>와 <장고>가 나치즘과 노예제에 대해 표면적으로나 영화적으로 말하는 바는 “그것들은 아주 나빴다”라는 주지의 사실뿐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들은 나치즘이나 노예제와 연결된 현재의 문제도 건드리지 못했다.

재차 웨스턴으로 돌아온 타란티노의 신작 <헤이트풀8>는 사뭇 달라 보인다. 남북전쟁 종전 10여년 후쯤을 배경으로 정한 이 영화에서 역사의 주요 활극은 이미 지나간 다음이다. 전쟁 중 도덕적으로 더럽혀진 여러 진영의 인물들은 피로와 앙심을 끌어안고 각자도생하던 중에 마주친다. 히어로도 주적(主敵)도 없는 <헤이트풀8>의 관심사는 허구적 카타르시스의 제공이 아니다. 역사의 패자를 복권하고 장르에서 소외돼온 소수자 집단을 주역으로 옹립하는 기초 작업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듯, 타란티노는 내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인물들을 마차와 잡화점이라는 단순한 공간에 가둬놓고 그들 사이에 오가는 증오와 거래를 그린다. 두 전작과 달리 <헤이트풀8>에서, 연표에 기록된 역사는 내러티브를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헤이트풀8>는 미국 역사와 영화, 그리고 영화사를 비스듬히 교차시키며 그 접점인 고립된 잡화점 안에 고밀도의 독자적 시공을 창조한다.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19세기 중반 서부의 공기, 타란티노 영화의 에센스,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 미국의 여전한 이슈인- 특히 최근 수년 동안 경찰의 과잉 대응과 총기 사고로 부각된- 인종 갈등과 정치 지형의 뿌리가 연결된다. 조급한 기색 없는 연출은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어 우아하기까지 하다. 내게는 <헤이트풀8>가 타란티노의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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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풀8>는 70mm 서부극다운 설산 풍경으로 시작하지만, 중반 이후 주요 무대가 되는 미니의 잡화점에 도착하기 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마차 객실 안에서 보낸다. 악천후라는 특수 상황은 웬만하면 한 지붕 아래 앉아 있지 않을 사람들을 동행으로 묶는다. 두명의 현상금 사냥꾼 루스와 워렌(커트 러셀, 새뮤얼 L. 잭슨), 연행 중인 범죄자 데이지(제니퍼 제이슨 리), 마침 행선지 마을로 부임 중인- 적어도 그렇게 주장하는- 보안관 매닉스(월턴 고긴스)가 합승한다. 같은 일을 하지만 생포를 선호하는 루스는 새디스트에 가깝고, 절박한 인간은 위험하기에 반드시 시체로 만들어 운반하는 워렌은 안전제일주의자다. 그것이 전쟁을 겪은 두 사람이 몸을 의탁한 삶의 방식이다. 둘은 상대 수중의 수배자를 탐내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는다. 백인 데이지는 체포된 처지에서도 ‘니거’ 워렌과의 동승을 불쾌해한다. 루스는 남군 소속이었다가 변절한 매닉스를 경멸하고, 매닉스는 워렌이 전쟁 중 저지른 잔인한 행위를 들춰내며 조소한다. 북군이라고 흑인을 진심으로 일원으로 받아들였겠어? 좁은 마차 안에서도 혐오의 화살표는 사방으로 돋친다. 이 불편한 동행은 거센 눈보라를 피해 찾아간 미니의 잡화점에서 먼저 와 있던 한 무리의 낯선 자들을 만나면서 확대된다. 주인으로부터 잡화점을 잠깐 맡았다는 멕시코인(데미안 비치르), 악명 높은 남군 퇴역장군 샌포드 스미더스(브루스 던), 신임 사형집행인 명함을 내미는 오스왈도 모브레이(팀 로스), 말 없는 카우보이(마이클 매드슨)가 그들이다. 이중 스미더스를 제외한 나머지의 신원은 입증할 길이 없다. A의 이름이 정말 A인지, B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짜 있었던 일인지, 그들 중 은밀한 한패나 데이지의 친구는 없는지 오리무중인 가운데, 대다수 인물이 상대를 판단하고 대응 방식을 결정하는 지표는 딱 두 가지, 인종과 돈이다. 스미더스는 사람의 피부색만 알면 다른 정보는 필요없다고 일갈하고, 워렌은 “백인이 무장해제해야만 흑인이 안전하다”는 신념을 실천한다. 한편 손님 중 누군가가 범죄자라면 두 현상금 사냥꾼에겐 위협인 동시에 돈벌이다.

8인의 드러난 혹은 숨은 목표가 무엇이건 이들은 적당한 때가 오기까지 꼼짝없이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내전 종료 후 증오와 갈등의 불씨를 안은 채, 한 국가에서 공존할 길을 떨떠름하게 모색해야 했던 당대 미국인들처럼. 와이드 스크린에 잡힌 넓은 원룸 잡화점은 어느 순간 미국 지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급기야 ‘구획 짓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테이블 중심으로 경계를 그읍시다. 저쪽 끝은 필라델피아, 이쪽은 조지아.” 이 대목부터 로버트 리처드슨의 카메라는 부쩍 가게 곳곳을 분할해서 촬영한다(<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에 의하면 <헤이트풀8>가 선택한 울트라 파나비전 70 포맷에는- 타란티노 영화가 애용해온- 줌렌즈가 없다. 리처드슨과 타란티노는 컷을 하거나 낮은 크레인숏, 돌리숏 위주로 잡화점 실내 장면을 찍었다). 전란 후 미국의 재건은 시작됐지만 새로 들어설 질서의 본성도 의심스럽다. 모브레이는 감독을 대신해 정의를 분류한다. “유죄 판결을 받은 당신을 사형집행인인 내가 광장에서 목매달면 문명사회의 정의고, 피해자의 유족이 당장 들이닥쳐 당신을 죽이면 개척지의 정의다. 후자는 통쾌하고 전자에는 감정이 개입하지 않는다. 바로 그 냉정이 문명다운 정의의 본질이다.” 과연 <장고>와 <헤이트풀8>에서 사람들은 법에 집착한다. 현상금 사냥꾼은 영장을 내밀고, 서류가 없으면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이 하는 일은 죽은 인간을 돈과 바꾸는 행위고 노예제는 살아 있는 인간을 사고파는 일이었다. 이것은 사적 구제에 비해 얼마나 고결한가? 영화 내내 원경에서 들려오는 위협적 바람 소리가 암시하듯, 준거 규범의 허술함을 눈치챈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래서 다시금 피부색에, 돈에 매달린다. (다음에 계속)

<바이클론즈 4기 메가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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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지혜

지난해 11월 방영이 끝난 TV애니메이션 <바이클론즈 4기 메가비스트>(연출 이달, 고동우 외, 각본 김미혜)를 뒤늦게 따라잡았다. 지난 세 시즌도 그랬지만, 인생살이에 유용한 교훈이 지구방위대 5남매의 분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빛난다. 어느 날 모든 시민의 스마트폰에 뜻모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재앙을 예감한 도시는 사재기와 선동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발신처를 추적하던 맏이 태오는 문득 이미 일어난 비이성적 혼란이 바로 재앙임을 깨닫는다. 카운트다운이 0이 될 때까지 내버려두기로 한 태오의 한마디. “이렇게 된 거 다들 정신이라도 차려야지!” 한편 래오와 지오는 전투 중 미워하는 상대의 얼굴이 여기저기 나타나 고전한다. 증오는 다른 것들을 흐릿하게 보게 만들고 진짜 논점을 놓치게 하는 것이다. 이번 시즌 적수인 마담 흉의 무기 중 하나는 ‘뇌추피추’ 부적. 희생자의 사고 회로에 침입해 중심에 이르면 혼을 빼앗는다. 그런데 5남매의 살림꾼인 둘째 래오의 머리에 들어간 ‘뇌추피추’는 맥을 못 춘다. 공과금, 할인쿠폰, 콩나물 삶는 법 등 일상의 걱정이 만든 미로가 너무 복잡해서다. 하루하루의 생활이야말로 나쁜 마법을 막는 최선의 방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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