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에 처음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건 포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 감독들의 토론이 벌어지는데, 공식경쟁부문의 기자회견 못지않게, 아니 더 깊은 얘기들이 오가고는 했다. 이거 참 재미있다고, 우리도 이런 걸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우리’ 영화평론가와 부러워했는데 그 평론가는 한국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더니 정말 그런 자리까지 장만했다. 한국의 국제영화제들은 이제 하나같이 관객과의 대화를 주요프로그램으로 잡아놓고 있다. 영화제가 토론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한국에서 꽤 의미있는 토론교육장이 된 셈이다.
포룸에서 모방하지 못한 장점은 그 배후, ‘독일키네마테크의 친구들’이란 운영주체다. 포룸은 지난 1971년, 베를린영화제가 이미 경직되어서 새로운 영화를 수용못한다고 판단한 이들이 만든 대안영화제로 시작됐다. 베를린영화제는 곧 자기들의 대안을 포섭해들여 포룸에 독립된 땅을 분양해주었다. 그곳은 정치적으로건 영화적으로건 첨단이나 변방에서 떠오르는 영화들의 포럼이 되었다. ‘한국독립단편’이나 <상계동 올림픽>같은 다큐멘터리도 그렇게 베를린에 갔다.
서베를린시절, 영화제가 끝나면 주상영관이던 초팔라스트에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둑이 터진 양 밀려들었다. 반면 포룸의 극장에서는 예술영화나 고전, 낯선 나라의 낯선 영화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다시 가동되곤 했다. 그 예술영화관의 중심관 역할을 해온 아르제날도 영화제와 함께 새도시 건설이 진행중인 베를린 중심부로 이사를 해왔다고 한다. 프로그램들은 여전하다. 아르제날 못지 않은 선의를 가지고도 오슨 웰스다 오즈다, 영화를 들고, 이 극장 저 극장을 전전할만큼 상황이 열악한 우리 사정을 슬그머니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제가 생기고 토론장이 생겼으나 아직은 없는 것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니까.
이미 국내에도 소개됐듯, 22년동안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이던 모리츠 데 하델른이 이번 축제를 끝으로 베를린을 떠난다. 또다른 집행위원장, 포룸을 30년간 주재해온 독일의 영화평론가 울리히 그레고어도 이참에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발견했고, <조용한 가족>으로 포룸 포스터와 책자표지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레고어에겐 <상계동 올림픽> 사건이 기억에 남는 모양이었다. “아세요? 외교행낭으로 비디오 테이프들을 날라왔다는 걸.” 그는 지난해 포룸 사무실에서 만난 한국 기자에게 물었었다. 포룸 초청을 계기로 그때, 서울의 독일문화원에서는 그 영화들의 상영회를 준비했었다. 한국정부의 항의에 무산되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