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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활기찬 제3의 공포

<제3의 공포>

1985년에 나온 영화로 <제3의 공포>가 있다. 중저 예산의 덜 알려진 외국영화가 한국에 소개될 때 간혹 엉뚱한 번역 제목을 다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중에서도 도가 지나치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The Stuff>다. 그 뜻은 물건, 어떤 것, 무엇인가를 말한다. 3이라는 숫자도 없고 공포와도 관련이 없다. 영화를 보면 극중에서 사람들이 간식으로 먹는 생크림처럼 생긴 음식에 ‘The Stuff’라는 제품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제품명으로 사용된 고유명사라고 보고 제목을 ‘스터프’라고 붙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2022년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영화 제목도 그대로 한국에서 공식 제목으로 쓰는 시대이니, ‘스터프’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은데 1980년대에는 굳이 번역한 제목을 썼다. 번역을 하더라도 적당히 ‘물건’이나 ‘그것’ 같은 제목을 붙였다면 통할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뜬금없는 <제3의 공포>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영화의 중심 소재인 간식이 <제3의 공포>라면 ‘제1의 공포’나 ‘제2의 공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영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한국영화 중에 <제4의 공포>가 있는데 그 영화에 영향을 받아서 붙인 제목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별로 좋은 제목은 아니라고 본다. 일단 이 영화를 무서운 영화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괴한 장면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만 보면 공포물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넓은 범주로 따져보자면 이 영화는 알 수 없는 괴물이 세상에 퍼져 이 사람 저 사람 공격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으므로 괴물영화라고 볼 순 있다. 그렇다면 공포물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그 알 수 없는 괴물이 문제다. 영화 속 괴물은 다름 아닌 중심 소재, 즉 생크림 모양의 간식이다. 떠먹는 요구르트처럼 생기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떠먹는 요구르트가 꿈틀거리며 사람을 공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먹은 사람의 몸 내부에서 사람을 이상하게 바꿔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황당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 영화는 그 황당한 느낌을 그대로 가져와서 웃음의 소재로 활용했다. 즉 이 영화는 기괴한 느낌을 살려서 공포영화의 냄새만 살짝 나게 만든 코미디물이다. 농담과 웃긴 얘기가 많이 들어 있다. 시작 장면은 거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산을 지나가다 이상하게 생긴 하얀 물체가 땅속에서 튀어나와 있는 걸 본다. 보통 사람이면 페인트 같은 게 어디서 스며나온 것이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칠 것이다. 호기심 많고 의심 많은 사람이라도 특이한 습성을 가진 나무의 뿌리에서 즙이 새어나온 것 정도를 상상하며 관찰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유심히 그 하얀 물질을 지켜보다가, 문득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본다. 그리고 “이거 맛있는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동물이 본래 길을 가다 하얀 게 땅바닥에 있으면 찍어 먹어 보는 생물인가? 배우는 넉살 좋게 그 멍청한 모습을 코미디 연기로 보여준다. 관객은 이 물질의 정체가 궁금할 것이다. 1980년대 영화의 유행대로라면 우주에서 떨어진 요구르트나 액체처럼 생긴 흰색 외계인일 수도 있다. 지구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진화한 생물이라면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아주 긴 세월 동안 지하 깊은 곳에서 살면서 사람과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땅속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던 대단히 희귀하고 특이한 형태의 생명체가 우연히 노출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물질의 정체에 대해선 영화를 끝까지 봐도 알 수가 없다.

대신 이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내용을 풀어나간다. 이 이상한 생명체가 맛이 있고 먹다보면 중독성도 강하다는 것을 알아낸 사람들은 포장해 판매하기 시작한다. 도무지 어디서 온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이것의 이름은 기막히게도 그냥 물건, ‘The Stuff’라고 붙인다.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흙 속에서 솟아난 외계 생명체 같은 걸 퍼담아 파는 거지만 유행에 걸맞은 멋진 포장으로 꾸며 멋있는 사람들이 그걸 들고 다니는 모습을 촬영해 화려한 TV 광고를 선전한다. 그러자 제품은 지나칠 정도로 급격하게 인기를 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 물건을 사먹고,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등장인물 중 한명이 이 물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갈등이 모험으로 이어진다. 간단하게 따져보면 이 영화는 돈을 벌기 위해 싼값에 입맛을 당기게 할 수 있는 재료라면 인체에 해롭더라도 마구 사용하는, 돈에 눈먼 식품 업자들을 질타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다보면 제품의 질과는 관계없이 광고로 그럴싸하게 포장만 하면 잘 팔리는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1980년대 소비문화와 거기에 맞물려 있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런 내용 못지않게 간식이 사람을 공격하면 괴상하고 웃기지 않을까 싶어 후다닥 만든 거라고 볼 수도 있다. 날카로운 사회 비판 의식으로 가득 찬 영화라고 하기에는 좀 오락가락하는 대목도 많고, 이야기의 균형이 어긋난 대목도 눈에 띈다. 주인공이 얼렁뚱땅 악당들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을 보다 보면 “사람들이 저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고, “하필 어떻게 저때 저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대충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그래도 이상한 구경거리, 싱겁지만 재미난 대사, 이게 다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느낌이 어울려 그럭저럭 보다보면 시간은 잘 지나간다. 나는 이런 영화의 가치도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꼭 감동을 주거나 엄청난 재미를 줘야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욕심으로 덕지덕지 무리한 장면을 끼워넣었다가 어색한 느낌만 날 뿐.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망하는 영화들은 지금도 얼마든지 나온다. 차라리 좀 신기한 장면을 던져주면서 볼만한 걸 만들겠다고 한 영화들이 시간이 흐른 뒤에 더 쉽게 볼 수 있고, 보고 나면 오히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 경우도 많다. 영화 교육 기관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배출된 제작진을 동원하고, 몇 차례씩 제작사와 투자사의 심사를 통과한 후 세계시장의 배급을 노리며 제작했다는 최근의 영화들을 줄줄이 보다보면, 괴상한 소재라도 영화 한편으로 활기차게 꾸려낸 <제3의 공포> 같은 이야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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