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에겐 침묵할 때는 손톱을 물어뜯고, 말할 때는 눈을 찡긋거리는 버릇이 있다. 같은 인터뷰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예의 빈틈없는 모습이지만, 카메라 아닌 사람과 눈맞추고 얘기할 때는 슬그머니 해묵은 습관을 드러내버린다. 차인표에 대한 이런 발견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다. 성공한 청년 사업가와 속물적인 양아치 사이에서 외줄 타듯 변주해온 근육질의 ‘나이스 가이’ 이미지가 차인표를 담아내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었다는 깨달음에 비하면.

지난해 12월, LA 근교에서 <아이언 팜>의 밤샘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감독과 배우 등 소수의 한국인이 할리우드 현지 스탭 속에 섞여 바쁘게 오가고 있었고, 그 가운데 차인표가 있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검고 긴 패딩코트 차림의 그는 여느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주연배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스탭들에게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고, 함께 어울려 간식을 먹었다. 처음엔 차인표를 경계했다는 미국 스탭들은 어디에서든 “This is our star”라고 자랑스레 소개하게 됐고, 한국 스탭들은 현장진행에 한몫하는 그를 ‘차 PD’라고 불렀다.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냥 일하기 편한 사람이구나, 우리가 좋은 배우랑 일하는구나, 하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차인표는 미국 프로덕션에서 마련해준 개인 트레일러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촬영 막간, 촬영장 한켠에 놓인 난로 앞에서 차인표는 의미심장한 얘길 들려줬다. “할리우드 진출이 목표라고 말들 하면서, 그렇게 못하잖아요. 언어문제라기보다 의지가 없어서인 것 같아요. 구체적인 노력들을 안 해요. 주윤발이 처음 미국 와서 뭐했는지 아세요? 2년 동안 조깅하고 영어공부만 했어요. 누가 손끌고 데려다 주기만을 기다리는 건 문제예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그 언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말은 쉽다’며 딴죽을 걸어보고도 싶었다.

그로부터 두어달 뒤, 차인표가 보란 듯이 한방을 먹였다. 그 유명한 시리즈 출연거부 사건. 그리고 다시 한달 뒤, 차인표는 미국 폭스사가 제작 지원할 무협코미디 시리즈에 출연이 결정돼, 30분짜리 파일롯(데모 필름)을 찍었다. 독일에서 제작하는 멜로영화에도 출연을 약속한 상태. 제작이 성사되기까지는 두편 다 변수가 많지만, 결과야 어쨌든 차인표 혼자 힘으로 길을 열었다는 게 중요하다. 할리우드 진출설로 세간이 떠들썩할 때 다시 만난 차인표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4년 만에 선보이는 영화 <아이언 팜>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차인표는 농담삼아 자신을 월드컵 배우라고 부른다). “떡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흥행이 안 돼 봐서, 감이 잘 안 와요.” <아이언 팜>은 차인표를 위한 영화다. 육상효 감독은 “차인표의 경직된 이미지를 코믹한 컨텍스트에 끌어들이고 싶었다”면서, 아예 차인표를 모델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리고 차인표는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받아본 반가움에다, 미국 촬영과 영어 연기라는 새로운 시도에 혹해” 선뜻 출연을 결정했다. “저를 캐스팅하려는 감독님 중 열에 아홉은 제 이미지를 바꾸고 싶고 망가뜨리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나름대로는 다양하게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봐요.”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혈혈단신 미국행을 감행하고, 막강한 연적의 존재에도 굴하지 않는, 바보스러울 만큼 순수한 남자 아이언 팜으로의 변신은 배우 차인표에게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제 딜레마가 극중 인물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툭하면 집사람 이름, 애기 이름 거론되고, 뭘 하더라도 자연인 차인표로 비치는 거예요. 이번엔 영화 속 인물로 보일 수 있을까, 그게 관건이죠.”

배우 차인표로서는 불만이겠지만, 우리는 그를 두번의 색다른 신드롬을 일으킨 스타로 기억한다. 한번은 서울에 입성한 ‘백마 탄 왕자’로, 또 한번은 국회에서도 칭찬한 ‘애국 청년’으로. 하지만 두번째 신드롬을 부추긴 이들에 대해 차인표는 불만이 많다. <아이언 팜> 촬영 때 스탭들과 함께 쓰라며 미국으로 모자랑 티셔츠를 맞춰 보낸 팬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맘으로 그간의 소식들을 홈페이지에 적어 올린 것이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줄 몰랐다고 했다. 게다가 유승준과의 비교 분석이라니. “제가 그 영화에 출연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이민가야 했을걸요. 툭하면 팔팔 끓어오르고, 몰매 때리는 분위기가 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참 씁쓸해요.” 출연거부 소동이 바다 건너 알려지면서 비판하는 메일도 심심찮게 날아왔고, 인터뷰 거부한다고 “한국 정부에서 못하게 하는 거 다 안다”는 식으로 넘겨짚는 외국 기자도 있었다. 차인표의 자리에 다른 배우가 캐스팅돼 촬영중이니, 그 사건은 이제 일단락된 셈이다.

차인표는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그의 분신들과는 딴판이다. 영화로는 재미를 못 본 반면, TV에서는 승승장구해 왔는데, 그 묘한 불균형 속에서 어떻게 평온을 찾은 것일까. 차인표는 성공에도 연연하지 않고, 실패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짱>과 <닥터K>가 부진했던 원인도 남의 말하듯 냉정하게 진단한다. “복합적인 이유죠. 연기를 못했고, 건방졌어요. 무슨 보따리장사하듯, 영화를 너무 우습게 알았다고 할까. 하지만 후회는 안 해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관객 수나 드라마의 시청률이 그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연기로 일가를 이루겠다거나, 평생 연기만 하고 살겠다고 못 박지도 않는다. 물 흐르는 대로 그냥 살아갈 작정이라고.

“저, 실존주의자예요. 저한텐 하루하루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해요. 그렇게 작은 만족을 누리며 사는 거나, 많이 이루며 사는 거나, 사는 건 다 같잖아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기는 생활이고, 한 작품 할 때마다 인생의 한 챕터가 넘어가는 것이다. “제가 좋아서 한 작품들이에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어, 이런 건 흥행배우가 하는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