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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으로 변신! <공공의 적>의 이성재

통쾌하다, 식칼 CF 밖에 안들어온다 해도

“더 사악하게 했어야 했는데….” 기가 막힌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시체 위로 허연 밀가루를 무심히 뿌려대던 희대의 인간말종을 연기해놓고 “더 막 가지 못해서 아쉬웠다”고 말하는 이 사람이, 과연 그 이성재가 맞긴 한 걸까? “선배만 보면… 아파요….” 교통사고처럼 다가온 사랑에 울먹거리던 남자(<거짓말>)의 간절한 목소리가, 개팔자가 상팔자인 아파트에서 마누라에게 구박받고 쪼그린 채 잠이 들던 불쌍한 남편(<플란다스의 개>)의 등짝이, 삶이 하루밖에 허락되지 않은 아이를 호적에 올리기 위해 숨이 찰 듯 뛰어가던 안타까운 아버지(<하루>)의 눈동자가, “사람이 사람 죽이는데 이유 있어?”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한 패륜아의 목소리가 될 거라곤, 샤워실에서 격렬하게 마스터베이션을 해대는 근육질 남자의 위풍당당한 등짝이 되리라곤, 실수로 셔츠 좀 더럽혔다고 대낮에 칼을 들이미는 살인마의 섬뜩한 눈동자가 될 거라곤, 아무도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즐겼던 것 같아요.” <공공의 적>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와, 세상에 이렇게 나쁜 놈이, 했다던 이성재는 일단 출연을 결정한 이후부터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어차피 조규환은 나쁜 놈이니까, 여기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면 오히려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사작한 것이다. “뭐랄까, 선한 역과는 다르게 묘한 일탈의 즐거움이랄까, 쾌감이랄까? 그런 걸 즐기니까 시원하고 통쾌한 느낌이 있었어요.” 이성재 하면 떠오르는 눈물 많고 부드러운 남자의 굴레가, 밤새 일하고도 아내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스위트한 남자의 구속이, 어쩌면 그를 더 먼 곳으로, 아주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재씨, 이제 무서워서 어떻게 봐요?”라든지 “스크린으로 들어가 한대 패주고 싶었다”는 감상평(?)은 악역을 맡은 배우로서는 칭찬 아닌 칭찬이다. “뭐, 거부감을 가지시는 건 처음부터 예상 못한 일이 아니었어요. 영화 들어가기 전에 강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성재야, 너 한 3년간은 CF 안 들어올 거다, 면도날이나 식칼CF라면 모를까…(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조규환의 칼자루를 쥐게 만든 건 감독에 대한 기본적 신뢰와 함께 바로 입버릇처럼 말하던 악역에의 욕심 때문이었다. “물론 전에 말하던 악역은 나쁜 놈이라도 당위성이 있었죠. 하지만 조규환은 달라요. 그냥 극 속에 툭 하니 던져진 인물이죠.” 별 다른 계기도, 이렇다 할 배경도 없이 ‘내추럴 본 배드보이’로 설정된 조규환이 극 속에서 해야 할 일은 너무 명확했다. 바로 누가 봐도 한대 패주고 싶은 철저한 ‘공공의 적’이 되는 것. 그러나 “분명이 미워해야 되지만 다음 신에서 꼴보기싫을 만큼은 아닌…”이라는 조규환에 대한 강우석 감독의 요구대로, 코미디의 리듬을 온몸으로 타고 있지만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은 살인마를 연기한다는 것은 한시라도 균형을 잃으면 떨어져버리고 마는 외줄타기 같은 것이었다. 하여 “뭘하든 그대로 놔둔” 철중 역의 설경구에 비해 이성재에게는 디테일한 시선 하나에까지 코치가 들어갔다. 더 나아가지도, 덜하지도 않은 선까지.

“<공공의 적>은 철저하게 경찰영화이고 강철중의 영화예요. 물론 배우라면 누구나 강철중 같은 역할이 탐나겠죠. 하지만 나는 조규환을 선택했고 그렇다면 철저히 철중을 서포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규환이 살아야 강철중도 산다는 거죠.” 누군가 <공공의 적>을 보고 설경구의 연기을 칭찬한다면 그 칭송의 50%는 이성재에게 돌아와 마땅하다. “경구가 섭섭해 할는지 모르지만 난 조규환에 대한 애정이 더 많다”는 강우석 감독의 뒤늦은 고백이나 “규환이 없었으면 철중도 없는 것”이라는 설경구의 명쾌한 대답도 결코 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매니저 없이 일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성재의 생존은 전략이기보다는 타고난 본능이다. 그럴싸한 이미지플랜을 세워놓고 활동의 고저장단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하루>에서 <신라의 달밤>으로 <공공의 적>에서 산악영화 <빙우>로 그저 수분이 조금 부족하다 싶을 때면 촉촉한 멜로로, 조금 풀어진다 싶으면 다시 긴장감 넘치는 코미디나 액션영화로, 마음이 가는 대로 옮겨갔을 뿐이다. <공공의 적> 때문에 시작한 규칙적인 운동은 탄탄한 근육뿐 아니라 단단한 자신감까지 불려주었다. “사실 그다지 많은 작품을 하지도 않았잖아요. 그 5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변한 게 있다면 카메라를 조금이나마 덜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걸 거예요. 사실 전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자유롭지 못한 걸 느끼거든요.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안성기 선배님이, 여전히 카메라가 무섭다, 는 말을 하신 걸 보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조금 안심이 되더라고요.”

강박적일 만큼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생활 이면에 추악한 본능을 숨기고 있는 살인마란면에서 조규환의 어깨 뒤로 <아메리칸 사이코>의 크리스천 베일의 그림자가 드리워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성재는 “특별히 어떤 모델을 세워놓고 연기했다기보다는 내 안에 숨어 있던 사악함을 끄집어내서 표현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내게 없는 새로운 부분을 만들어낸것이 아니라 그동안 발견되지 못했던 내 안의 다른 부분을 보게 된 거죠. 그 안에 조규환이 있었고, 결국 조규환도 이성재의 한 부분일 뿐이에요.” 바다의 끝이 나무로 만든 세트인 걸 알아버린 트루만처럼 이제 이성재도 세트 밖으로 통하는 문을 과감하게 열어젖혔다. 사시사철 해가 비추고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랑스러운 말만 나누는 곳이 아닌, 어둡고 거칠지만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진짜 세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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