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한풀 스러지고 가을 느낌이 바람 속에 막 스미기 시작하는 환절기, 꼭 그처럼 분위기가 달라진 전지현을 만났다. 지난해 <엽기적인 그녀> 이후 거의 1년 반 만에 으로 필름 카메라 앞에 설 준비를 하고 있는 전지현은, 마치 긴 방학을 마치고 첫 등교를 하는 학생 같은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긴 머리에 투명한 얼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여전하지만 군살이 확 빠져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몸매와 좋아진 말솜씨, 특히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는 속깊은 말들에서, 그녀가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아주 잘 나이를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엽기적인 그녀> 때의 전지현이 풋풋한 여름 같았다면, 을 준비하는 전지현은 내밀한 가을풍을 지녔다고 할까. 어딘가 전지현에게서는 전에 없던 어른스러움이 내비쳤는데, 그건 신작 이 가진 분위기 탓인 듯도 했다. 은 스릴러다. 전지현이 연기할 여주인공 연은 어린 나이에 결혼한 주부. 혼령을 보는 증상에 시달리고, 또 과거 인간관계에서 받았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병원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려고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원(박신양)이 오고, 자신 역시 죽은 이의 혼령을 보는 정원은 비슷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연과 가까워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화력에 관한 얘기라지만 바탕색이 무섭고 어둡다. 여름날의 전지현이 펼쳐보이기엔 더더욱. 전지현은, “<시월애>의 청순한 이미지에서 <엽기적인 그녀>의 엽기 이미지로 변해 봤기 때문에 연기의 변화를 갖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면서도, 처음의 낯섦을 기억해낸다. “그래도 정말 내가 스릴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항상 <엽기적인 그녀> 같은 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하기로 했지만, 너무 낯설고 부담스러워서, 한 보름 동안 시나리오를 밀쳐두고 생각을 안 해 버리기도 했어요.”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 연이라는 인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주부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 어떨 때 주부들이 스트레스를 받는가, 무당기질이 있는 여성들의 인터뷰 자료, 육체적인 병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지현은 연이 되기 위해 요즘 많은 자료테이프를 보고 있다. 그렇게 낯선 인물의 심연을 탐사하다보니, 처음의 무서움이 서서히 걷혀가고 연과 자신 사이의 비슷한 점까지 발견하게 됐단다. 근데 그게 바로 “연도 나처럼 무서워한다”는 것이라나.<화이트 발렌타인> <시월애> <엽기적인 그녀>에 이어 이제 4번째 영화를 시작하는, 5년차 배우 전지현. 전지현은 요즘 “일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편하고 즐겁다”. “예전에는 사실 재미는 잘 몰랐거든요. 근데 언제부턴가 너무 재밌어지더니 요즘엔 흥분되기까지 해요.” 그 원인을 캐보는 대신, 전지현은 계절처럼 “그냥” 찾아온 그 재미를 갈무리하는 법을 익혔다. 종종 누군가가 ‘너 예쁘다, 너 최고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다스린다. “나중에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제가 편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이 모든 게 있어도 없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원래 별로 집착이 없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누가 또 제 매력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도 ‘에이, 몰라’ 그러고 말아요.”
<4인용 식탁>은 전지현이 영화 데뷔작인 <화이트 발렌타인>에서 이미 함께한 적 있는 박신양과 다시 만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업 때문에 인사를 나눌 때, 프로듀서가 둘 사이에서 “구면이시죠?”라고 했더니, 박신양이 “그때 그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답했단다. “이상하죠. 저는 키도 안 컸고 얼굴도 안 달라졌는데….” 하지만 이상해 하는 건 아마 그녀 혼자뿐일 거다. 전지현은, 정말 ‘그때 그분’보다 많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우로서 그녀의 성장기는 아직도 한창이다. 이 그녀에게 또 한번 중요한 성장의 단계가 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