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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이스풀>로 돌아온 다이앤 레인
박은영 2002-08-28

소녀에서 여인으로,그 아름다운 생존

“뭘… 벗으라구요?”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고압 전류에 감전된 여인. 청년은 그저 코트를 벗으라고 말한 것뿐인데, 그에게 매혹당한 여인은 그렇게 속내를 들키고는 귓볼을 붉히고 만다.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아들을 둔 결혼 11년차 주부가 ‘감각의 제국’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다. 서른일곱, 다이앤 레인이 <언페이스풀>의 그 ‘위기의 여자’로 돌아왔다. 화사한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지난 세월의 무게가 쌓이긴 했지만, 여전히 섹시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니, ‘여전하다’는 수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커튼 클럽> 이후 18년 만에 다이앤 레인과 재회한 리처드 기어가 “그때 다이앤은 눈부신 아이였지만, 지금은 눈부신 여인이다”라고 증언하고 있으니까.

그 18년 동안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스무살도 채 되기 전에 백만장자였던 아이돌 스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겸허한 배우가 됐고, 맷 딜런과 존 본 조비 등 당대의 터프가이들과 염문을 뿌리던 스캔들메이커는 크리스토퍼 램버트와의 사이에 아홉살배기 딸을 둔 싱글 맘이 됐다.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의문. 다이앤 레인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나는 일하지 않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좋지만, 빛과 그늘을 품은 스타덤이 아쉽진 않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잊어버리기 쉬운, 그러나 그래선 안 될 사실 한 가지. 다이앤 레인이 20년 넘는 세월을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생존’이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다이앤 레인은 여전히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소녀다. 동네 양아치들의 패싸움에 빌미가 되는 <아웃사이더>의 빨강 머리 소녀이고, 폭주와 방화의 아수라장 속에서 옛사랑의 비호를 받는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의 로커이고,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차지하고픈 <커튼 클럽>의 보스의 여자다. 다이앤 레인의 페르소나는 자신이 원하는 걸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자기애가 유난히 강했고, 사랑이 장애가 될 때는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았다. 그렇듯 쉽게 범접할 수도 떨쳐낼 수 없는 거대한 매혹으로, 다이앤 레인은 80년대의 청춘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커튼 클럽>으로 실패의 쓴맛을 본 다이앤 레인은 “배우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때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건 일종의 반항이고 도피였다. 연기 코치인 아버지와 <플레이보이>의 간판 모델인 어머니 사이에서, 다이앤 레인은 배우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여받았다. 여섯살 나이에 연극무대에 올랐고, 열세살에 찍은 영화 데뷔작 <리틀 로맨스>로 ‘제2의 그레이스 켈리’라는 찬사를 들으며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다. 너무 비범한 유년기였다. 어린 다이앤은 “내가 예쁘지 않거나 인기가 없어도 빼앗기지 않을 일”을 갈망했고, 결국 자연인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그 3년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온 다이앤 레인에게 할리우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외로운 비둘기>라는 TV시리즈로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이트 게임> <채플린> <나이트 무브> 등 그만그만한 영화들이 손짓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로 <저지 드레드> <머더 1600> <퍼펙트 스톰> 같은 블록버스터부터 <워크 온 더 문> 같은 인디영화까지, 다이앤 레인의 필모그래피가 갈지자를 그리며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 “1천 파운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데도, 내게 5파운드만이 주어진다는 것은 남들이 꼭 그만큼만 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제 조금씩 그 무게가 불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난 2월에 운명을 달리한 다이앤 레인의 아버지는 <언페이스풀>이 다이앤 레인의 연기인생을 바꿔놓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 아버지가 죽으면 연기를 그만두리라는 판타지가 있었다고. 나를 배우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아버지니까.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넌 바로 나의 커리어, 그 전부라고. 난 아버지의 메이저 프로젝트다. 인정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프로젝트는 남았다. 다이앤 레인은 지금 그 ‘미완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애타게 다음 작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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