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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 [4] - <우디가 말하는 앨런>
정지우(영화감독) 2000-04-04

우디 앨런을 좋아하세요?

스티그 비에르크만의 <우디가 말하는 앨런>

<모두 주고 싶다>란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 때문이다. 재수 시절, <수학의 정석I>을 누군가 훔쳐 가버린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난 아주 기분이 더러워졌다. 수학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나로서는 <수학의 정석1>을 다시 사야 된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분명 정석의 제일 앞부분 1장 집합만을 볼 것이 뻔한 책을 다시 사야 된다는 것이 기분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예 사지 않기에는 한편으로 마음이 불안했다. 그 책을 베개로 삼을지언정 수학의 정석 정도는 갖고 있어야 되는 것이 재수생의 도리로 여겨져 남영동 어느 헌책방을 가게 되었고, 산처럼 싸여 있던 책더미 사이에서 <모두 주고 싶다>라는 이장호 감독의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스무살 시절에 이장호 감독이 쓴 일기장을 태멘이라는 곳에서 출판한 책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뻐 수학의 정석을 훔쳐간 놈한테 감사하는 마음까지 갖고 <모두 주고 싶다>를 한숨에 읽어버렸다.

‘그 시절 나를 가장 괴롭히던 것은 왕성한 성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로 시작하는 그의 일기는 스무살 시절을 먼저 살았던 그의 모습이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점이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는데 그의 스무살 시절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책의 말로이다. 아버지 집에 보관되어 있던 그 책은 몇년 전 여름, 수해(水害)로 완전히 물 속에 잠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다른 책들과 함께 물결에 쓸려 내려갔다. 이장호 감독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 모든 것을 다 줘버리자고 책제목을 <모두 주고 싶다>라고 지었는데 물난리를 통해 없어져버린 그 책은 제목에 어울리는 퇴장을 한 셈이다. 그 물난리 덕에 아버지가 아끼고 모아오던 책과 그림들이 모두 못쓰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끼면 똥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모두 주고 싶다라는 책제목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주고 싶다’라는 정도는 깨닫게 되었다.

근데 읽어보라 권해주고픈 이 책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여서 <모두 주고 싶다>같이 창작자의 내면풍경을 그린 몇권의 책을 추려보았다. 이장호 감독의 글 정도로 사적인 글은 아니지만 그들 영화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감독이 직접 쓴 책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감독의 길: 구로사와 아키라가 쓴>, 혹은 감독들과의 인터뷰들 <한국영화연구1 임권택>,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 <우디가 말하는 앨런>, <히치콕과의 대화>, 혹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파스빈더에 관한 평전>, <비열한 거리: 마틴 스콜세지에 관한 평전> 등등인데 그 중 <우디가 말하는 앨런>이라는 우디 앨런에 대한 스티그 비에르크만의 인터뷰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추천해볼 만한 책이다.

‘일정한 예산만 넘지 않는다면 최소한 1년에 한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며 시나리오, 연출, 배우 스탭의 캐스팅 권한, 최종 편집권 등 모든 자유를 확보하고 있는’ 우디 앨런은 하고 싶은 영화와 할 수 있는 영화가 일치하는 희귀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카바레의 코미디언으로 데뷔할 당시에 개인 매니저였던 잭 롤린스, 찰스 H 조프는 ‘매니저란 직업의 비극은 매니저가 자신의 일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의뢰인이 자신을 점점 덜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고 얘기했지만 40여년이 흐른 뒤에도 그들은 우디 앨런의 프로듀서이며, 스벤 닉비스트, 카를로 디 팔머, 고든 윌리스 같은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들과 일을 하며 <맨해튼: 고든 윌리스 촬영 1979>을 만들 당시에는 우디 앨런만을 위한 흑백현상소를 만들기도 했으며, 반대로 데뷔 시절부터 그의 영화에 쓰이는 자막 타이틀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폰트와 글자크기까지 똑같이 촬영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뉴욕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뉴요커이며 재즈바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디 앨런의 영화와 인생에 대한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생존해 있는 거장들 가운데 우디 앨런만큼 ‘행복’한 감독은 없는 듯하다. 혹,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우디 앨런이 누군지 모르는 독자가 있다면 책보다는 먼저 그의 영화를 권하고 싶다. 한편이라도 그의 영화를 본다면 이 책은 자연스레 읽고 싶어질 것이다.

저자소개

스티그 비에르크만은 스위덴의 영화 저널리스트이자 영화감독이다. <베르히만이 말하는 베르히만>(Bergman om Bergman)의 저자이며 <잉그마르 베르히만>(1971) <하얀 벽>(1975) <셔터 뒤>(1984)등 여러 영화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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