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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가. 몸이 아파서 얻는 휴가. 직원 수가 200명에 육박해가는 우리 회사만 봐도 연중 전 직원이 몽땅 다 출근해 있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어디가 아플까. 물어보면 병명 한번 가지가지다. 허리가 아프대요. 목 디스크래요. 엄지발톱이 뽑혔대요. 며칠째 못 자고 있대요. 장염이래요. 이명증이래요. 대장에 용종이 생겼대요. 안과에 다녀온대요. 그런데 참 특이한 건 연차가 보통 10년이 넘은 직원들은 웬만해서 아프지 않고 한 2년이나 3년쯤 되는 직원들의 병가 횟수가 가장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경력이 좀 되었다고, 후배들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의심쩍어해서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같은 마음으로 경험하고 겪어왔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직장 초년병 시절의 나는 일상이 환자였던 것 같다. 쓰고 싶은데 벌리는 돈은 없고, 놀고 싶은데 나이 먹어감이 두렵고, 어쩌다 일은 하게 되었지만 그 미래가 너무 빤하고, 그런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빗자루와 삽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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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피아노 주위로 생활쓰레기가 가득 찬 음대생 주인공의 단칸방을 부감으로 잡은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유명한 장면이 한국판에서 4인 가족이 살아도 될 넓이의 복층 오피스텔 부감으로 바뀌면서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원작’이란 장사가 될 법한 설정과 소재만 취하는 방어적인 판권 구매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최규석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JTBC <송곳>은 정확하게 반대편 끝에 위치한다. 대형마트에서 노조를 조직해 부당한 해고에 맞서는 원작 웹툰을 컷 단위로 몽땅 옮겨버리는 드라마가 우선 신기하긴 한데, ‘왜 이렇게까지 하나’라는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이는 내용 수정의 외압은 물론, 제작 과정의 타협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가 웹툰의 실사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구태여 드라마를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웹툰을 읽을 때 주로 주인공 이수인 과장의 내레이션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면, 드라
[유선주의 TVIEW] 웹툰을 충실하게 옮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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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라는 땅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데는 셰익스피어의 역할이 컸다. 그는 조국인 영국만큼이나 자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오셀로>(베네치아), <겨울 이야기>(시칠리아) 등 여러 작품들을 썼다. 특히 베로나 배경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일 것이다. 지금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 문학세계의 입문서로, 또 셰익스피어 비극의 전범으로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가 이 고전의 매력을 놓칠 리 없다. 영화의 초창기 시절 조르주 멜리에스가 비극을 각색한 작품을 내놓은 이래, 이탈리아의 ‘소년과 소녀’는 끊이지 않고 스크린의 소환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명장 조지 쿠커의 <로미오와 줄리엣>(1936), 이탈리아의 멜로드라마 장인인 프랑코 제피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1968), 그리고 MTV의 후원 아래 제작된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줄리엣>(1996) 등 고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사랑하고 복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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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좋아한다. 언제나 좋아해왔다. 참 잘 만든 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84>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더불어 디스토피아 문학의 정수라고 소개한다. 나는 <1984>를 침소봉대 문학이라 불러왔다. 오웰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수긍할 만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오세아니아의 풍경은 너무나 우화적이다. 실수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통제와 절대다수 시민의 완전무결한 무지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성립 가능한 그런 시스템이 굴러갈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가 지나치게 순진해 보였다. 비유와 풍자란 대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있는 힘껏 최대한 부풀려서 반대 진영을 겸연쩍게 하고 입을 묶어버릴 요량으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가만 있자 지금 이 말을 조금 더 근사하게 비유할 문장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이를테면,
떠오르지 않는다.
<1984>는 두번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역시 1984년에 만들어진 마이클 래드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역사를 지배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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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1주기를 맞아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가사와 멜로디가 재생되며 견디기 힘든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과서 국정화 반대 콘서트를 준비 중인 이승환에게 한 네티즌이, 번호표라도 뽑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신해철 다음은 네 차례”라며 살해 협박을 하는 것을 보니, 그냥 이것저것 많이 떠올리고 써서 고인에게 좋은 것(글)들만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신해철이 영화음악가로서의 욕심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쏜다>(2007) 개봉 당시 직접 인터뷰했을 때, 그는 “<오멘>(1976) 영화음악을 맡은 제리 골드스미스를 너무 좋아한다”며 “영화음악감독은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타이틀이 아니라, 기회만 된다면 본격적으로 작업해보고 싶은 욕심나는 영역”이라고 말했다.
<하얀 비요일>(1991)에 작곡가 서영진의 노래
[에디토리얼] 영화음악가 신해철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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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라고 폼 잡고서 모니터 앞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던 어느 현장이었다. 꽤나 친한 조명감독에게 선문답처럼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조명감독이여. 그대는 영화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심 그 조명감독이 “영화의 본질은 빛입니다”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면, “이런 후카시 같으니라고!”라고 마구 놀려댈 요량으로 던진 농담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농담치고는 너무나 현명했다. 그 대답은 “영화의 본질은 스케줄입니다”였기 때문이었다. 난 꼬았던 다리를 푼다. 그래. 영화의 본질은 스케줄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한날한시에 모여야 만들어지는 게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영화는 스탭들이 만드는 것이다. 꿈과 환영처럼 펼쳐지는 저 스크린 뒤, 거기엔 카메라와 붐대를 들고 버티고 있는, 무전기와 연장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는 스탭들이 있다.
프리 프로덕션, 현장, 포스트 프로덕션에 모두 참여하는 연출부와 제작부
[곡사의 아수라장] 감독은 대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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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아닐까. 최근의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들을 들으며 설명하기 힘든 묘한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올리버 헬덴스의 이 곡을 듣고 그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렸다. 속이 다 후련하다. 가슴이 뻥 뚫린다.
요즘 계속 느껴오던 그 답답함이란 바로 ‘에너지의 부족’이었다. 최근의 일렉트로닉 댄스 경향은 ‘탈EDM’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자극적인 에너지만 키우는 것을 넘어 오래 들을 수 있는 작품성 있는 예술을 하자는 것이었다. 유독 보컬 콜라보와 멜로디를 강조한 디스클로저와 아비치의 행보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시도도 반복되다 보니 이젠 클럽 특유의 강력한 베이스 사운드와 정신 못 차릴 화려한 그루브가 그리워진다. 그냥 댄스 팝 앨범을 듣는 것 같았던 아비치의 이번 앨범을 듣고는 그런 배고픔이 더 커진 상태였다.
그런데 올리버 헬덴스의 《MHATLP》는 두 대척점 사이 훌륭한 접점을 찾아냈다. 지겨울 정도로 오래 들어온 몬스터 EDM도
[마감인간의 music] 이 음악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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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더 폰> 타임 전화기
[정훈이 만화] <더 폰> 타임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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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자리 숫자의 부채가 기록된 학생회 장부를 물려받은 3월이었다. 등록금이 싸서 학자금 대출이 흔치 않았고 그나마 대출받은 학생들 70%(대학신문 추정 수치)가 먹튀해도 귀찮아서 추심에 들어가지 않던 시절, 난생처음 빚더미에 앉은 학생들은 시름에 잠겼다. 이것은 아마도 태곳적부터 쌓여왔을 빚, 1, 2년으로 달성하기는 불가능한 위업이 아닐까. 그렇잖아, 7천원짜리 찌개를 네명이 한개 시켜서 그걸로 밥도 먹고 술도 먹었는데, 소주 그거 기껏해야 한병에 2천원, 우리 과는 30명밖에 안 되는데 그걸 얼마나 많이 마시면 외상값이 이 정도 나올 수가… 있구나. 아, 그런 거였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빚을 짊어지고 우리는 이 부채를 후손에게만은 대물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갚자, 먹는장사를 하는 거야, 먹는장사가 남는 장사라잖아, 잔디밭에 천막 치고 술을 팔자고. 이렇게 추운데? 그럼 정종을 데워 팔면 되지. 정종은 비싸서 결국 팔지 못했지만, 그처럼 무모하게도 산바람 몰아치는 3월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이과 망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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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그리고 <팀 버튼의 화성침공>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파이 브릿지>는 뉴욕의 어느 방에서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내 우리는 루돌프 아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마추어 화가(마크 라일런스)가 간첩 혐의로 미국 정보국에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필버그 감독이 선택한 첫 숏은, 그가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의 <삼중 자화상>을 즉각 연상시킨다. 그림에 포착된 찰나의 앞뒤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능력과 완벽한 구도로 유명했던 노먼 록웰과 감독 스필버그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내긴 어렵지 않다. 영화 내내 구체적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인물이 그리는 본인의 초상으로 이야기를 연다는 착상도 적절하다.
10/12
뒷줄에 앉은 덕택에 극장 안 관객의 흔쾌한 몰입을 체감했다. <마션>은 바로 앞 <카운슬러> <엑소더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감자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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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풍문여고를 돌아 높은 담장과 느티나무 그늘을 따라 정독도서관까지 하늘하늘 걸어가다보면, 왼쪽에 아트선재센터가 나온다. 그 건물 뒤편께에 살았다는 서태지는 <소격동>을 통해 80년대 기무사와 녹화사업의 기억을 더듬었다지만, 98년 아트선재센터가 개관하면서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꾸준히 그 길을 걸었던 나에게 소격동은 중요한 독립예술영화관이 있는 동네다. 희한하게 아트선재센터에 볼일이 있을 땐 항상 10여분 일찍 도착한다. 기어이 근처 구멍가게에서 싸구려 캔커피를 사들고 담배 한대를 피워야 직성이 풀리는 알다가도 모를 속내. 어쩌면 점점 낯설게 변해가는 소격동 풍경을 바라보며, 한때 그곳에 범람하던 영화적 욕망, 극장 바깥으로 쏟아져나와 왁자지껄 수다를 떨던 그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주워섬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98년 퀴어영화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곳이 바로 그곳이다. 전국의 선남선녀 변태들이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99년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의 소격동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