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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가을이 사라져 긴 겨울로 접어드는 이 시기는 추위에 대한 육체의 감각이 마음으로 곧장 이어진다. 고독한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간에 홀로 혹은 둘이서 연애영화를 보기 좋은 때다. <이터널 선샤인>(2004)의 재개봉 흥행이 개봉 성적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접하니, 누군가가 시기를 읽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시네마테크에 한두번 걸릴 때면 몇몇 관객이 마치 유적처럼 이 영화를 다시 찾곤 했다. 어떤 영화들은 개인의 유적이 되고, 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유적지가 된다. 이것은 현대 도시에서 우리가 떠날 수 있는 일종의 순례다.
순례자들의 영화에서 열성 팬의 프랜차이즈, 오타쿠의 컬트, 근본주의자의 클래식과 외골수의 외사랑을 받는 외로운 영화들을 빼고 나면 연애영화가 남는다. 극장 안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자기 인생의 영화라며 당신도 감화, 감동받을 거라 동행에게 말하는 사람의 달뜬 미소와 외딴 자리에 홀로 앉아 침묵하며 그대도 언젠가 혼자서 이 영화를 다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순례자들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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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느슨하기만 했던 대학에 경쟁의 칼바람이 몰아치면서 수십년 동안 나태의 선두 주자였던 우리 과에도 공고가 붙었다. 졸업논문 심사를 3단계에 걸쳐 진행하게 되었으니 졸업 예정자들은 먼저 논문 목차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졸업논문이란 벼락치기로 며칠 만에 쓰는 거라 알고 지낸 세월이 4년 반인데, 원통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4년 만에 졸업할걸 그랬지.
나는 ‘해방 이후 전남 지역 인민위원회의 현황과 한계’라는 거창한 주제로 목차를 만들어 교수님 연구실로 갔다(진짜 엄격하게 하려면 미리 제출해야 했겠지만 어차피 우리 과 나온 분들, 교수들이라고 나태하지 않을 리가 없다). 15분에 걸쳐 목차를 검토한 교수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쓸 수 있겠나?” 나는 긴장했다. “이건 논문이라기보다 단행본 목차에 가까운데?” 그렇겠지요, 단행본 목차처럼 보이겠지요, ‘해방 이후 전남 지역 인민위원회’가 주제인 단행본 한권을 가져다가 그냥 베꼈거든요. 나는 정교수가 되어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저임금 외계인 노동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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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문득 개인적인 ‘응답하라 1988’ 기억이 떠올랐다. 먼저 세상을 뜬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 동구에서 출마하여 허삼수를 꺾고 화려하게 정치권에 데뷔한 1988년 13대 총선 얘기다. 당시 ‘변호인’ 노무현을 ‘정치인’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영삼이었다. 당시 나는 부산진구 거주민이었지만, 동구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친구들도 많았기에 그 기억이 꽤 선명하다. 결정적으로 허삼수가 중학교 선배였다. 그가 아침 조회 때 교장의 소개로 단상에 올라 만세 삼창을 했던 기억도 난다.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힘차게 만세를 외쳤던 이유는, 그가 전교생에게 단팥빵을 돌렸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잘 참는 성격이었던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단팥빵을 꼭 쥐고는 목 놓아 허삼수를 외쳤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과거 언론 통폐합을 총괄한 5공화국의 실세였던 허삼수는 투표권도 없는 ‘얼라’들에게 빵을 돌렸기 때문일까, 무명의 인권변호사 출신
[에디토리얼] 김영삼과 변호인 노무현,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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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이 지칠 때마다 찾게 되는 건 당연히 음악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익숙하지 않은 음악이 고파질 때가 있다. 대중음악과는 상이한 영역에서 파생한 음악 말이다. 게임 음악이 바로 그렇다. 요즘 게임 음악의 수준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클래식 뺨칠 만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흘러나오고, 어떤 게임에서는 화끈한 록 음악이 화면을 가득 수놓으며, 또 어떤 게임에서는 ‘전설’ 폴 매카트니가 참여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수많은 게임 음악 명곡 중에서 내가 꼽는 최고가 하나 있다. 바로 <파이널 판타지6>(1994)의 오프닝 곡인 <Terra’s Theme>다. 일단 <파이널 판타지6>는 게임 역사 전체에서도 클래식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게임의 더욱 위대한 성취는 그 영향력이 비단 게임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다름 아닌 게임 ‘음악’의 역사에서도 이 작품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사운드
[마감인간의 music] 음악이라는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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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내부자들> 정치하는 사람들
[정훈이 만화] <내부자들> 정치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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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즌포>는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 국가안보국 민간사찰 내부 고발 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사건의 일부다. 폭로 현장의 녹취록이다. 스노든은 고발자의 인격에 대한 왈가왈부가 폭로 내용의 본질을 흐릴 웹 문화의 속성을 경계해, 정보공개 시점과 범위를 신뢰하는 언론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 <시티즌포>는 스노든이라는 청년의 퍼스낼리티에 관객을 밀착시킨다. 일단 이 영화의 세팅 자체가 특정 감독과 기자를 지목해 접촉한 그의 작품이다. 스노든은 대학 동기 중 한명쯤 있을 법한 똑똑하고 수수한 청년이다. 강조하려고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으며 본인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지 과연 아는 걸까 의심할 만큼 덤덤하다. 감시 카메라로부터 키보드를 가리려는 ‘마법 망토’ 안에서도 스노든은 우리의 시선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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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는 짝짓기에 실패하거나 싱글로 복귀한 시민을 동물로 변신시켜 추방하는 사회의 이야기다. 인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가재와 금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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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에는 잠언집이 등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로 그 잠언집 같은 위력을 발휘해왔다. 수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위로받고 희망을 품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연인과 다시 시작한 커플은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 선택을 저주하며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한 연인들의 수와 얼추 비슷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게 마음에 들어요”, “지금은 그렇겠죠. 그런데 곧 거슬려할 테고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요”로 이어지는 마술같이 낭만적인 화해의 끝에서 나는 늘 당혹스러웠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걸까? 저렇게 쉽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은 기억을 지웠으니까. 결론은 알고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렀던 모든 괴로움을 잊었으니까. 그래서 실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장은 괜찮을 수 있다.
이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다시 시작하면 우리 과연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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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 사실 이들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냉전시대는 물론 지금도 근무한다. 우리가 ‘간첩’, 스파이라고 불러서 그렇지, 자국에서는 엘리트 애국자들이다. <의형제>의 강동원이나 <7급 공무원>도 마찬가지. 정식 직급이 7급일 뿐 최고로 훈련된 비공식 외교관이다. 이처럼 동사무소(주민센터)에 근무하는 이들만 공무원이 아니다. 요즘은 특채, 별정직,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나 비상근 업무도 많고 다양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공무원은 공무원”이다. ‘철밥통’, 안정성, 비교적 쉬운 업무라는 통념이 뿌리 깊다. 최근 일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9급 공무원 시험에 지원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 한때 저항적 지식인이었던 손학규가 쓴 이 책의 제목은 우석훈의 주장대로 제목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군사 정권 시절 얘기지만 1970년대 중반에는 육사만 졸업해도 5급 공무원(사무관)으로 특채되기도 했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9급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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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인 쌍문동 골목길은 저녁마다 아이들을 시켜 반찬을 주고받고, 형편이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연립주택에서 십년 넘게 유년기를 보낸 나 역시 같은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살림살이를 공유하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가전제품 할부 외판원이 시연하는 녹즙기나 전기쿠커 따위는 집집마다 빠짐없이 구입했다고 한다(엄마 말에 따르면 그렇다). 일종의 경쟁이나 반드시 동참해야 하는 사교 활동이었을까? 이웃에서 음식이 오면 절대 빈 접시로 돌려보내지 않는 것도 아주머니들끼리의 교양이었고, 뭘 담아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엄마의 모습도 꽤 여러 번 보았다. 맞벌이가 많은 동네의 분위기는 또 달랐을 것이다. 동네마다 조건과 필요에 따라 교류의 범위나 형식이 달라질 뿐 이웃끼리 가까우면 가까운 만큼 불편한 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간의 정이라 말해지는 대부분이 정말 그
[유선주의 TVIEW] 좋기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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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의 첫 수업 시간. “아침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 때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교실에 들어와 뭔가를 나누어주었다. 칫솔과 치약이었다. 학교 근처의 보건소에서 온 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보건 위생에 대해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이 나누어준 칫솔과 치약으로 이 닦는 방법을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치약을 보느라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앙증맞게 생긴 작은 치약의 하얀 바탕 표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호피와 차돌바위, 그리고 홍길동과 곱단이. 신동우가 그린 만화 <풍운아 홍길동>의 주인공들이었다. 알루미늄 껍데기 위에 그려진 신동우의 그림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멋진 것을 나눠주는 학교란 정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 치약을 애지중지 모셔두고 한동안은 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내 주위에는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그는 왜 만화를 더 그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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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무니다.” 뭐 새삼스런 얘기지만 요즘 <검은 사제들>의 강동원의 미모가 화제다. 분명 같은 의상인데도 한번도 저런 ‘핏’을 본 적 없다는 성직자들의 농담 섞인 증언도 들려온다. 인터넷에는 영화에서 사제복을 입은 그의 모습을 데생한 이미지도 돌아다니고 있다. 그중에는 <씨네21> 1028호 <검은 사제들> 김윤석, 강동원 2인 표지를 데생한 것도 있었다. 표지 전체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기에 뒤에 서 있는 배우 김윤석을 대충 그릴 수밖에 없는 ‘지못미’의 고뇌가 느껴지는 컷이었다. 그처럼 1028호의 표지와 내지 이미지가 업데이트된 <씨네21> 페이스북과 포털 사이트 기사 아래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동원은 사람이 아니라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인터넷에 낚시성 제목으로 가득한 어뷰징 기사가 난무한다지만, 표지를 비롯한 인쇄된 사진들은 이른바 오프라인 잡지들의 자존심과도 같다. 여
[에디토리얼] 사람이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