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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허진호 / 출연 한석규, 심은하 / 제작연도 1998년
“테이프가 늘어지게 들었다.” 카세트테이프 세대라면 한번쯤 써봤을 말. 너무 많이 들으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 특정한 구간만 늘어진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내게는 늘어진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대학 시절 내 허름한 자취방엔 꾸역꾸역 아르바이트를 해서 장만한 비디오덱이 있었고 언젠가 동네 비디오가게 폐업정리 때 산 비디오테이프 몇개가 책장에 꽂혀 있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커녕 극장도 잘 가지 않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 비디오덱을 사고 테이프들을 주워왔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포레스트 검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취향이랄 것도 없이 마구잡이로 가져온 테이프 열댓개 중 유일하게 늘어난 테이프는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였고 사실 이 영화의 존재도 잘 몰랐다.
대학 1학년 말, 엄하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태어나 처
[내 인생의 영화] 황석희의 <8월의 크리스마스> 비디오 시대 스타일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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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68세대 리버럴 아버지는 구조조정 전문가로 일하는 딸의 삶이 진정 안녕한지 어느날부터 적극 간섭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1/3이 넘어가도록 부녀는 닮은 데라곤 없어 보인다. <토니 에드만>의 기업 컨설턴트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창백하고 마르고 단단하다. 그녀는 피로도 상처도 딱 붙는 비즈니스 슈트와 킬힐로 동여매고 다닌다. 반면 은퇴 교사인 이네스의 아버지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덥수룩하고 육중하고 느리적거린다. 이네스는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정답을 말하려고 긴장하고, 빈프리트는 상대가 예상치도 못한 말을 하려고 벼른다. 부녀가 이루는 시각적 대조는, 한쪽이 벌거벗고 한쪽이 특별하게(?) 차려입은 후반의 한 대목에서 정점을 이룬다. 하지만, 이 아버지와 딸은 결국 얼마나 닮았는지!
02/23
<문라이트>도 먹고 먹이는 행위가 중요한 영화다. 식사가 그냥 대화 장면에 마땅한 맥락이 없어서 들어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개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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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비정규직 특수요원> 더 이상 낚이는 일은 없도록
[정훈이 만화] <비정규직 특수요원> 더 이상 낚이는 일은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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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조리극 <더 랍스터>(2015)에서 가까운 미래의 사람들은 혼자를 기르며 살 수 없다. 어떻게든 완벽한 짝을 찾아야만 한다. 홀로 남겨진 이들은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무르며 ‘서로를 기르는 법’을 배우는 가운데, 유예기간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 영원히 숲속에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타인의 생명을 사냥해서 그 유예기간을 늘려야 한다. 호텔 사람들이 단체로 인간 사냥에 나설 때 극단적인 고속촬영과 함께 1920년대 그리스 노래인 <Apo Mesa Pethamenos>가 흘러나온다. 굳이 해석하자면 ‘내부로부터의 죽음’으로 “겉은 살아 있어도 속은 죽었다”고 노래한다. 남을 사냥하며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죽어버린 삶이다.
혼자 사는 게 힘들다고 느낄 때는 아파서 몸져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깻잎 먹을 때, 라는 어느 비혼 지인의 얘기에 모두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 적 있다. 그러고 보니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혼자를 기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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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원작 소설 <침묵>(1966)을 읽은 것은 2013년 1월의 겨울이다. 당시 나는 당인리 발전소 담벼락을 따라 들어가는 외진 골목길, ‘합정 슬럼’이라 부르던 동네에 살았다. 내가 기거하던 판잣집(농담이 아니다), ‘Southern Tears’로 이름을 붙인 무허가 건물에서 보내는 혹한은 괴로웠다. 월세가 싼 대신, 지독하게 추웠다.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침낭 속에 몸을 파묻은 채 책만 읽으며 소일하는 삶은 어느 흑백사진 속 젊은 콜린 윌슨(<아웃사이더>(1956)의 작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만 결코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영화를 선택한 죄, 아니 첫 영화를 잘못 만든 죄로 그에 대한 오랜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일러에 기름을 넣고 그날의 끼니로 찐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근처의 홍성사에 들러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메모장에다 적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나의 교회입니다.”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시노다 마사히로의 <침묵>과 마틴 스코시즈의 <사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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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가가처럼 ‘이상한’ 매력의 소유자에게 끌리기도 하지만 때론 고전적인 게 좋다. FKA 트위그스처럼 4차원으로 몸을 휘감은 캐릭터도 좋지만 샬롯 갱스부르처럼 유럽풍의 우아함에 끌릴 때도 있다. 후자 취향이라면 니아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니아는 신곡 <Hurt You First> 뮤직비디오에서 단조로운 검은색 의상을 입고 미술관 같은 흰색 벽 앞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커다란 귀고리에선 심플함과 화려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뿌연 재즈 무드를 가진 보컬이지만 노라 존스처럼 마냥 달콤하지 않고 어둠과 슬픔이 배어 있다. 성숙함이 물씬 풍긴다. 템포와 사운드도 느릿하고 몽롱해 자극적이기보다는 여유롭다. 샤데이나 제시 웨어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냥 고전적이지 않다. 유럽 흑백영화 같은 무드 아래로 감각적인 힙합 비트와 전자음 베이스가 흐른다. 니아는 퓨지스의 멤버 와이클리프 진의 2007년 히트곡 <Swe
[마감인간의 music] 고전적 모던함 - 니아, <Hurt You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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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청승이랄까, 요즘처럼 월세가 주름처럼 밀릴 때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주책맞게 찾아 읽는다. 뱃사람들에게 붙잡혀 농락당하는 알바트로스, 영락없이 예술가 처지와 닮아 있다. “방금까지 그리 아름답던 신세가, 어찌 그리 우습고 추레한가!” 제아무리 하늘을 고고하게 날아도, “땅 위의 야유 한가운데”로 끌려내려온 알바트로스는 그저 다리를 저는 우스꽝스러운 예술가 신세라는 것이다. 월세 밀린 무능력한 광대라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생활력 없는 예술가들이 조롱만 받고 사는 건 아니다. 가끔 동정도 받는다. 2011년 최고은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난한 예술가들을 동정하는 소리들이 세상에 넘쳐났다. 수많은 이들이 “남은 밥과 김치 좀 주오”라는 슬픈 유언을 연민했다. 그 덕에 소위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졌다. 예술 경력에 덧붙여, 얼마나 ‘가난’한지를 증명하면 남은 밥을 적선하는 온정의 손길. 그 몇 개월치 식량이 아쉬워 나 역시 신청서를 내려다 충분히 가난을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예술이라는 노동의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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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무서움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귀신은 나를 보는데, 나는 귀신을 보지 못한다. 거기서 소름이 돋는다.
귀신의 ‘보이지 않는 이미지’는 힘센 자들에겐 군침 도는 매력이기도 했다. 추한 권력일수록 자신을 신비로운 공포로 감싸고 싶어 했다. 물론, 제아무리 귀신일지라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귀신은 ‘귀신도 곡할 노릇’을 사람에게 던진다. 흉내내는 자들은 애당초 ‘보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 게 아니었고, 귀신을 따라할 재간도 없기에 피치 못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 틈으로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자들의 그림자를 보아왔다. 뿌리를 찾자면 일제강점기 비밀경찰을 들 수 있다. 줄기를 찾자면 박정희 공포정치의 기둥 중앙정보부를 말할 수 있다. 꽃은 살인마 전두환 시절에 만개했던 국가안전기획부였다. 숱한 독립투사들이 비밀경찰에, 반독재운동가 장준하들이 중정에, 노동운동가 박창수들이 안기부에 의해 살해됐다. 그들은 귀신처럼 들러붙어 사람
[노순택의 사진의 털] K가 만든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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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헨리 토머스, 로버트 맥노튼, 드루 배리모어, 피터 코요테 / 제작연도 1982년
페이드인되듯이 서서히 세상을 인지하고 보니 날 키우고 있던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다는 걸 알게 됐다. 객지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던 부모님이 어린 나를 할머니에게 맡겼고 덕분에 나는 지리산 두메산골이 애초에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할머니는 첫 손자를 애지중지 키우셨고 아이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놀았다. 7살 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점등식을 하던 날, 집집마다 호롱불로 겨우 어둠을 밝히던 마을이 한순간에 대낮처럼 밝아지는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 그때까지 그런 빛을 본 적이 없었다. 10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청주에 어렵사리 장만한 집으로 나를 데려왔다. 소심한 성격 탓에 새로운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공부도 변변치 않은 데다 촌놈이라 놀리는 반 아이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할머니가 있
[내 인생의 영화] 박광현의 <E.T> 비약적 쾌감을 알게 해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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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코올중독 엄마가 쏟아내는 맥주캔을 모아 피라미드를 쌓으며 꾸제트가 다락방에서 혼자 노는 오프닝부터, <내 이름은 꾸제트>는 어른들 세계의 결함과 병 때문에 덩달아 고통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엄마가 추방돼서, 가족에게 성추행당하고 보호소에 온 일곱명의 소년, 소녀에게 가정은 반드시 그리운 곳이 아니다. 지혜로운 신입 카미유가 “난 여기서 사는 게 나아”라고 고백하자 꾸제트도 털어놓는다. “가끔 내가 어른이 돼서도 엄마랑 사는 꿈을 꿔. 엄마는 여전히 맥주를 마시고 혼잣말을 해. 나도 술을 많이 마셔. 그런 일이 안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둘은 헤어지기 싫어진다.
02/21
작가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와 배리 젠킨스 감독이 기억하는 1980년대 마이애미 서민 공공주택 단지는 젊은이들이 의식적으로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빈곤과 범죄, 마약중독의 악순환에서 인생을 건져내기 어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달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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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속담처럼 갈등에 동원되는 우연에는 상대적으로 너그럽지만, 문제해결에 동원되는 우연에 예민하게 가능성을 따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풀이과정을 자신의 고민에 대입해보게 되기 때문은 아닐까? 현실에는 내 고민을 해결해주려고 우연을 주관하는 작가 따윈 없다.
드라마에 숱하게 반복되는 ‘엿듣기’도 따지고 보면 정보 취득 행위인데 그렇게 얻어진 정보가 오해와 갈등의 재료가 될 뿐 해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도 우연이 문제해결에 개입하면 설득력을 잃기 때문이다. SBS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보여주는 신사임당(이영애)의 활약이 종종 시트콤화되는 순간들에도 대부분 우연이 겹쳐 있다.
사임당이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운평사에서 종이를 만들던 유민들이 몰살당했다는 회한 섞인 고백을 하는데 마침 과거 사건에 연루된 노인이 이를 엿듣는 장면을 보자. 이미 수차례의 암시가 있어 문제의 노인이 또 우연히 출몰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
[유선주의 TVIEW] <사임당 빛의 일기> 우연 남발은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