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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영화’라는 표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처럼 ‘정부’가 정해버린 표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라는 말이다. ‘일하는 주체이자 권리자’로서의 노동자를 악착같이 ‘순종적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근로자로 부르려는 시도 아래에서, 5월 1일의 ‘공식’ 명칭은 바로 1994년 제정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근로자의 날’이다. 물론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건 노동절로 부르건 간에, 근로기준법에 따라 ‘유급 휴일’이란 약속이 지켜지기만을 바랄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양성영화도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시네마워크 사업계획안’에 언급된 용어로 독립영화, 예술영화, 다큐멘터리영화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제작 영화에 한해 극영화건 다큐멘터리이건 일정 제작비 이하의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지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어쨌건 새 정부에서 새롭게 꾸려질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주성철 편집장] 다양성영화 지원사업에 동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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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카페라는 곳이 있다. 만화책을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볼 수 있는 데다 음료수와 주전부리까지 옆에 두고 내 집보다 더 편하게 원하는 만화를 골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실내 공기도 쾌적하고, 분위기도 좋다. 20여년 전, 만화방에서 라면을 끓여준다는 것이 놀라웠던 그 시절 만홧가게에서는 오뎅 국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구릿구릿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밴 만화책을 어둠침침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보던 경험을 이야기하면 ‘저 꼰대 놈이!’ 하면서 아무도 상대 안 해줄 것이다.
만화 카페의 주인들이 만화 애호가들이 분명한 것처럼 그 옛날 만화방과 만홧가게 주인들도 만화 애호가들이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30대 중반이었던 때, 동네 상가 안에 있던 만화방의 주인은 후덕한 몸에 인상 좋은 30대 중반의 아줌마였는데, 그녀의 만화방에는 손님들의 손이 닿지 않는 책장의 맨 위칸에 자신만의 명예의 전당이 있었다. 맨 위칸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에어리어 88>을 꺼내달라고
[뒷골목 만화방] 고바야시 마코토 <다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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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깨어 있던 나는 인터넷으로 커피머신을 고르는 중이었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켠 페이스북을 보고 문자 그대로 눈을 의심했다. 프로디지가 죽었다고? 프로디지가 죽었다. 맙 딥의 절반, 90년대 힙합의 아이콘, 뉴욕의 왕이 마흔을 갓 넘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힙합 팬에게 프로디지는 거의 영웅이었다. 나중에야 그의 키가 나보다 작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이보다 삭막하고 황량할 수 없는 비트 위에서 프로디지는 늘 자신이 자라온 지독하게 위험한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는 늘 거리의 진짜배기 사나이였고, 동시에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스무살 때부터 지속된 그 범상치 않은 어둡고 진지한 기운의 무게 뒤에는 그가 실제로 앓고 있는 병이 있었다. ‘sickle cell anemia.’ 우리말로 하면 겸상 적혈구성(性) 빈혈. 흑인의 유전병이자 불치병이었다. 프로디지의 병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투팍 때
[마감인간의 music] 프로디지, <You Can Never Feel My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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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인기를 끄는 주제다. 여자의 뇌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의 뇌는 누드에 약하다는 수준으로 쓰여진 국가 수준 학교성교육표준안은 아직도 폐기되지 않았고, 한국의 최상층 남성 엘리트들은 여전히 수렵채집시대의 남자 뇌, 여자 뇌에 집착한다. 사실 뇌의 성차를 주제로 나온 논문들은 성차보다 개체 차가 더 중요한 변수라는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매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런저런 차이들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은 수준이다”라는 내용에서 마지막을 빼고 “이런저런 차이가 발견!”이라는 제목을 다는 식이다. 얼마 전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한 초등교사 연수의 강의 자료에는, 남녀의 특성이 우뇌와 좌뇌를 연결시키는 뇌량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마르틴 코르테의 주장이 일부만 잘려서 실렸다. 그는 결론에서 성별간 차이보다는 개인별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며 부모의 성차별적 편견이 아이의 잠재력
[디스토피아로부터] 여자의 뇌, 남자의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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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차이밍량 / 출연 이강생, 양귀매 / 제작연도 2003년
영화보다 영화관이 더 좋았던 유년 시절, 집 근처에 극장 하나가 문을 열었다. 두개의 영화관이 함께 있었고 주변에 놀이공원, 스케이트장, 볼링장, 음식점도 있었다. 옛날식 단관 극장이 대세였던 당시로서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극장이 문을 열자 사람들은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을 섰고 ‘매진’이라는 붉은 글씨는 인기와 위세를 과시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어느새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대세다. 유년 시절에 인기를 끈 최신식 극장 역시 노후한 시설 때문에 폐관을 준비했다. 그곳이 문을 닫기 직전, 나는 한동안 가지 않았던 추억의 영화관을 찾았다. 예전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었고 극장엔 사람이 없어 직원을 찾아 영업 여부를 물어야 했다. 표를 끊고 극장에 들어가자 예전 그대로인 상영관이 보였다. 손잡이가 달린 푹신한 미닫이문, 의자 등받이에 씌워진 하얀 시트, 목을 잔뜩 추어올려서 봐야만 하는 커다란 스크린. 텅 빈 극장의 익
[내 인생의 영화] 양경모의 <안녕, 용문객잔> 극장의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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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 피의자를 신문하는 자리. 검사는 소파에 앉은 피의자 옆에 등받이 없는 보조의자를 끌어다놓는다. 말없이 시선을 떨어뜨린 검사의 눈치를 살피던 피의자는 엉거주춤 일어나 보조의자에 앉는다. ‘당신은 손님이 아닌 피의자로 내 방에 왔다’는 무언의 압박.
tvN <비밀의 숲>의 검사 황시목(조승우)은 어릴 때 뇌수술을 받고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된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상대를 더 집요하게 관찰해 정보를 모은다. 걸핏하면 고성을 지르는 열혈 검사, 폭력 형사 캐릭터에서 과하게 분출하는 감정을 덜어낸 셈인데, 보는 쪽에선 비로소 사람이 생각이란 걸 하는구나 싶다. 배우에겐 침묵과 시선의 밀도로 캐릭터의 지능을 설득해내야 하는 과제가 생긴 셈이다.
목적이 있을 때만 말할 뿐 남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시목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저마다 다른 화법을 지닌 인물들을 만나 도드라지고 또 비교당한다. 외톨이 검사 시목과 사건에 얽히게 된 경위 한여진(배두나)은 똑같
[TVIEW] <비밀의 숲>, 단단한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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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하루> 다시 눈을 떴을 때.
[정훈이 만화] <하루> 다시 눈을 떴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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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연락을 주고받다 끊긴 여배우가 있다. 연락이 끊긴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활동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거의 10년도 더 된 2000년대 초반에 처음 만나 인터뷰를 했었다. 이번호 ‘독립영화계 신 여성배우들 7인’ 특집처럼 여러 단편영화의 주인공 혹은 상업영화의 조·단역으로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들을 만나는 특집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 배우는 약속시간보다 무려 2시간 늦게 촬영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소속사가 없는 데다 집은 경상도라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노선표만 보고 버스를 잘못 탔기에 늦은 것이었다. 섭외 전화를 했을 때 서울에 있는 것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기자와 사진작가가 번거롭게 지방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인터뷰가 취소될까봐 “마침 오디션 보려고 서울에 있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부랴부랴 서울로 온 것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나누며 안 것이지만 “어디쯤 오셨어요?”라는 기자의 확인 전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이 얼굴을 기억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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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완공된 서울역 공중보행로를 건축유형으로 분류한다면 최근에 생겨난 형식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은 뉴욕의 ‘하이 라인’(The High Line)이지만, 첫 번째로 완공된 것은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La Promenade Plantee)다. 이 유형이 새로운 이유는 고가철도, 고가도로가 19세기와 20세기에 만들어진 구조물이고, 이 형식의 구조물이 더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철로가 필요 없어지는 이유는 보통 물류의 이동에 이용되는 철도가 도심에 위치할 이유가 적어진 것 때문이고, 고가도로가 철거되는 이유는 자동차를 우선하던 생각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공중보행로의 이유 있는 변형들
공중보행로로는 첫 번째로 만들어진 프롬나드 플랑테는, 1969년 파리 시내 바스티유역으로 연결된 고가철도의 운행이 중단된 후, 바스티유역이 오페라하우스로 개발되고 철로는 1993년에 공중공원으로 계획되었다. 파리를 계속 걸어다니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영화와 건축] <비포 선셋>의 프롬나드 플랑테와 뉴욕의 하이 라인, 그리고 서울로 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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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이발관 5집을 2008년에 샀다. 출근 전, 사인이 들어간 한정판 음반을 사고는 아침부터 야근하는 밤까지 들었다. 무수히, 반복적으로, 수백번씩. 어떤 곡들은 ‘천’ 단위를 훌쩍 넘겼다.
언니네 이발관이 데뷔했을 무렵에는 고등학생이었고 힙합에 빠져 있었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음반에 와서야 언니네 이발관의 전작을 듣고, 몇번의 공연을 보고- 지금 사라진 홍대 쌈지홀의 ‘월요병 콘서트’ 같은 것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중반 그들이 만들고 연주한 곡들은 내 20대의 노래가 되었다.
정규 6집 《홀로 있는 사람들》(2017)은 이석원이 곡을 쓰고 이능룡이 기타를 연주하며 전대정이 드럼을 연주하는, 우리가 아는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정규 음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애도>와 <혼자 추는 춤> 같은 곡의 노랫말은 그래서 더 구슬프다. 앨범 제목과 같은 8번째 곡, <홀로 있는 사람들>은 이석원의 소개 글처럼 ‘세상이 바라던
[마감인간의 music] 마지막에 대하여 - 언니네 이발관, 《홀로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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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윤리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결단코 타인을 알 수 없음을, 혹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들도 알지 못하게 되었음을, 혹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 다시금 모르게 되었음을 깨닫는 것. 모든 위대한 예술은 우리를 ‘모르게’ 만든다. 즉 지금껏 당신이 알고 있던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은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우쳐준다? 최근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을 다시 읽으며 소설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인종주의자로 찍혀 사임한 백인 노교수 콜먼 실크가 자신이 실은 하얀 피부를 가진 흑인이라는 진실을 밝히지 못했음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를 진짜 ‘알고’ 있는가? 이 소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이 폭력이 ‘정치적 올바름’을 등에 업는 경우, 자연스레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 좋지만, 오직 한 군데에서 틀렸다. 타인이
[문강형준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