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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제목도 잊어버렸지만, 유대인 학살을 그린 어느 극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었다.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떤 남자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행위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자 유대인이 이런 말로 그 변명을 내친다.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죄가 무겁다.’ 그 장면을 최근 계속해서 떠올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의 ‘책임’이라는 챕터에서 그는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를 그의 도쿄 사무실에서 만날 일이 있어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사람을 속이려는 정부에 대해서, 옳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계속 발언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추석이 되기 전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바쁜 추석 합본호 일정으로 후배들이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다녀온 터라 각종 선물로 입막음을 했다. 가마쿠라와
[주성철 편집장] 분복(分福),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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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밴드 푸 파이터스가 새 앨범을 발표했다. 《Concrete and Gold》라는 타이틀을 내건 음반은 멤버들의 자긍심 섞인 호언장담에 고스란히 부합하는 노래들을 들려준다. 광대하고 야심으로 가득 차 있는 하드 록 사운드가 펼쳐지면서 귓전을 강타한다. 강력하고, 강렬하다.
‘라이브한 질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푸 파이터스의 신보 《Concrete and Gold》는 내 기준으로 10점 만점에 최소 8점이다. 직접 본 푸 파이터스의 화끈한 라이브는 10점 만점. 그런데 여기서 잠깐. 몇가지 풍경들이 떠오른다. 먼저 DJ이자 프로듀서 캘빈 해리스의 공연에서 관객은 그가 ‘실제로’ 디제잉을 하고 있는 것인지, USB를 꽂은 채 디제잉 흉내만 내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다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또 어떤 대형 공연의 게스트로 초대된 그룹은 MR(반주 테이프)을 틀고 노래‘만’ 불렀다. 무대가 텅 비어 보여 불편했는데, 주위를 둘
[마감인간의 music] 푸 파이터스 《Concrete and Gold》, 음악을 듣는 이유, 음악을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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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떠나기 얼마 전 칼럼 연재 요청을 받았다. 망설여졌다. 몸이 한국에서 멀어지니 감각과 생각이 느슨해지면 어쩌지 하는 염려가 들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해외 체류가 다른 시선으로 한국을 보게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칼럼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낯선 도시의 카페에 앉아 뭘 쓸까 궁리를 하니 난감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예를 들어보자. 이곳에서 나이가 지긋한 이란 사회학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북핵 문제를 거론하게 됐다. 대화 도중 그분의 아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축구 이야기가 시작됐다. 마침 그날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결정된 것이다.
그날의 대화는 한없이 이어져서 종교와 시와 음악에까지 뻗어나갔다. 어쩌면 이날의 에피소드로 칼럼을 써도 될 것 같다. 문제는 원고 매수다. 8매다. 적당히 자르면 되지 않냐고? 바로 그게 문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느 날 낯선 타지에서 이란 부자(父子)와
부러진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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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가 나왔을 때, 나는 이 걸출한 ‘운전기사 영화’의 연출자에게 정작 운전면허가 없더라는 이야기에 꽂혔다. 감독이 이후 유럽에서 할리우드로 이사하면서 끝내 면허를 취득했는지, 혹은 처음부터 낭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영화사 사람들을 만나면 내게 “한국판 <드라이브>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설을 풀었다. 대대장 레토나를 몰다 갓 전역한 운전병 출신의 20대 남자가 밤마다 대리기사를 해서 먹고살던 중, 신출귀몰한 운전 솜씨가 알려져 어느 조직보스의 운전기사가 된다. 어느 날 보스는 그에게 한 여자의 출퇴근 에스코트를 맡기는데, 그녀는 허언증이 매우 심하니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믿지 말라는 경고를 기사에게 남긴다…. 이렇게 스토리를 읊다보면, ‘드라이브’에서 초롱초롱했던 사람들의 표정은 서서히 ‘한국판’과 ‘비슷한’에서 실망한 낯빛으로 옮겨가곤 했다. 게다가 레픈 감독과 나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
니콜라스 빈딩 레픈 <드라이브>와 월터 힐 <드라이버> 그리고 에드거 라이트 <베이비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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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장은 취임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 이명박의 장래희망이 사진작가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대통령의 희망도 사진작가일지니 회원들은 자부심을 품고 분발하라’는 취지였다. 이사장이 직접 들은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2009년 3월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명박은 인도네시아 순방 기자간담회에서 “은퇴하면 사진작가나 해볼까”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첫 월급으로 라이카 M3를 샀다고 자랑한 적도 있다. 1965년 무렵 은행원 월급이 1만5천원 정도였는데, 그 명품 카메라의 가격은 100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이명박의 ‘장래희망’은 거짓이었다. 그는 ‘이미’ 사진작가였다. 최근 확인된 포토아티스트 이명박의 맹활약을 살펴보면 “사진작가를 꿈꿨다”는 그 말이 겸손이었는지 사기였는지 헷갈린다. 이명박은 왜 자신의 작품활동을 숨겨온 것일까.
국정원 적폐청산 TF의 발표에 따르면 2011년 국정원 심리전단은 배우 문성근과 김여진을 좌
[노순택의 사진의 털] 사진작가를 구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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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킹스맨: 골든 서클> 킹스맨 본부가 공격을 받고 파괴됐네.
[정훈이 만화] <킹스맨: 골든 서클> 킹스맨 본부가 공격을 받고 파괴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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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애완동물이라고 불렀던 개와 고양이. 애완에서의 완(翫)이 ‘가지고 놀다’의 뜻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장난감’으로서의 애완동물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들을 ‘반려동물’이라고 부른다. 반려동물은 반려(伴侶), 즉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이다. 애완동물이었던 그들은 시대를 거슬러 이제 인생을 같이하는 짝으로서의 반려동물이 된 것이다.
‘반려동물의 마음을 읽’는 프로그램을 표방한 tvN <대화가 필요한 개냥>이 스타트라인에 섰다. 스스로를 4천만 비반려동물인의 대표라고 칭하는 김구라가 MC를 맡았다. 배우 이수경의 집으로 간다. 동동이와 부다, 두 형제견의 하루는 마치 이수경이 두 아이의 엄마인 듯한 느낌을 갖게한다. 그리고 알 길이 없는 반려견의 마음을 전문가의 해설로 듣는다. 동동이와 부다가 싸우는 이유도 알고, 어떻게 하면 이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솔루션도 곁들여진다. 패널들은 반려동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기
[TVIEW] <대화가 필요한 개냥> 내 반려동물과 대화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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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베넷 밀러 / 출연 브래드 피트, 조나 힐,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 제작연도 2011년
나는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달리기에 몰두했다. 망원 유수지에서 출발해서 한강공원으로 진입한 뒤 마포대교를 돌아 나오는 달리기, 거창하게 말하자면 단거리 마라톤이었다.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는 매일 달렸으니 주 단위로는 50km, 한달을 기준으로 하면 어림잡아 200km 정도가 된다. 적어놓고 보면 꽤 뿌듯한 수치이지만 사실 이 정도는 준아마추어에도 못 미치는 훈련량이다. 그럼에도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탓인지 달리는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나는 항상 무릎 통증과 족저근막염으로 괴로워했고, 갑작스런 소나기라도 맞는 날에는 영락없이 감기, 몸살에 걸려 며칠을 앓아 눕곤 했다. 허벅지나 종아리가 딱딱하게 굳어서 일상생활조차 불편하던 중에도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10km 남짓 되는 거리를 달리던 나날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때때로 기분이 상쾌하다거나 몸이 가볍다거나 하
조현훈의 <머니볼> 달리기를 사랑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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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스틸리 댄쯤 되는 줄 알아?” 존 카니의 <싱 스트리트>(2016)에서 주인공 코너(퍼디아 월시 필로)를 위시한 소년들은 디페시 모드 운운하며 ‘미래파’를 지향하는 가운데 ‘싱 스트리트’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한다. 이후 코너가 첫 번째 연습곡을 형 브랜든(잭 레이너)에게 들려주자, 형은 못마땅한 얼굴로 “섹스 피스톨스가 어떻게 연주하는지 알아? 배워서 음악을 하는 거 같아? 너희가 추구하는 건 다 속임수야”라며 “음악은 결코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고 충고한다. 여기서 섹스 피스톨스에 이어 언급되는 스틸리 댄은 ‘연주 기술’의 제왕으로 묘사된다. 음악이란 게 단지 연주 기술만으로 잘할 수 있는 거라면, 스틸리 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난 다음에 떠들란 얘기다.
그런데 정작 개봉된 영화의 자막에서 스틸리 댄은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이름의 ‘steely’를 ‘steal’로 간주한 것인지 도둑이 어쩌고하는 자막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하여간 그들이 혹시나 유명
[주성철 편집장] 즐거운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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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미식 장면들
얼마 전 일본에서 <구루메 만화의 역사>란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루메는 프랑스 말 ‘Gourmet’의 일본어 발음으로 미식가란 뜻이다. ‘구루메 만화’를 우리말로 옮기자면 ‘요리만화’ 정도가 될 것이다. 아직 한국에 정식발매되지 않았으니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일본 요리만화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흥미진진한 책일 거라 짐작한다.
내가 처음 일본 요리만화를 본 것은 70년대 중반 <소년 점프>에서였다. 초밥요리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는데, 그 당시 초밥은 커녕 생선회도 구경을 못한 나로서는 그 만화를 건성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었던 80년대 초. 만홧가게에서 무척 재미있는 만화를 보았는데 무협극화를 주로 그렸던 이재학이 그린, 무림의 고수가 주인공이 아닌 중원의 요리 고수들이 주인공인 만화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주인공이 주방장의 자리
[뒷골목 만화방] <와카코와 술> 신큐 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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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상반기의 힙합 노래’로 <N분의 1>을 꼽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볼멘소리를 하는 게 들린다. “이 노랜 너무 유명하잖아. 음악 별로 안 들었구나? 뻔한 걸 뽑으면 어떡해.” 물론 이 노래가 유명한 건 알고 있다. 얼마 전에 끝난 <쇼미더머니6>에서 가장 인기를 끈 노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것을 가지고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정한 통찰이라는 걸 넌 끝내 모르겠지.
<N분의 1>은 흡사 제이 콜의 <Note To Self>를 연상시킨다. 제이 콜은 이 노래에서 동료 래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15년 전에 우린 형들을 보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자리에 올라와 있잖아.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사랑이라는 걸 보여줘야지.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디스하고 싸우길 원해.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우린 계속 같이 갈 거야.” 에이셉 로키의 다큐멘터리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요즘 젊은 래퍼들이
[마감인간의 music] 넉살·한해·조우찬·라이노 <N분의 1>, 2017년 상반기의 힙합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