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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청년이 책장 앞에 서 있다. 전쟁에 패망한 직후 일본 작가들이 소년, 소녀들을 위해 쓴 소설부터 동서양의 소년, 소녀 소설들이 총망라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다. 아마도 애니메이션 기획 자료로 구입한 모양인데, 아무도 읽은 흔적이 없는, 구입해서 처음 꽂아놓은 그대로의 책들이었다. 마침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태업을 하는 분위기여서 별일이 없었던 청년은 책장 담당 여직원이 귀찮아할 정도로 매일 그녀에게 열쇠를 받아 책장을 열어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는다. 몇 페이지 보다가 재미없으면 집어치우고 또 다른 책을 집어들고 읽는다. 청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습이다.
청년 하야오는 책장의 소년, 소녀 문고를 읽으면서 ‘이 작가의 번역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런 아름다운 외국 소설을 읽게 되었구나’ 감탄도 하고, ‘어릴 적 좋아했던 책 속의 그림들을 이런 작가가 그린 것이구나’ 하면서 새삼스럽게 소년, 소녀 소설을 다시 발견하
[뒷골목 만화방]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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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로직의 싱글 <1-800-273-8255>는 발매된 지 6개월이 지난 노래다. 하지만 최근 ‘역주행’하며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올랐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의 퍼포먼스다. 일단 이 노래의 제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800-273-8255’는 미국의 ‘자살 방지 핫라인’이다. 로직은 이 노래에서 자살 충동을 극복하고 삶에 희망을 다시 걸어보기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퍼포먼스에는 여기에 두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1)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난 사람 50여명이 무대 위에서 로직과 함께했다. 그들의 티셔츠에는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2) 로직이 노래 후반부에 음원에는 없는 ‘연설’을 했다. “주류매체가 외면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건강, 불안, 자살, 우울증 그리고 인종차별, 성차별, 가정폭력, 성
[마감인간의 music] 로직 <1-800-273-8255>, 이 엄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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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생리대가 인체에 유해한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몇달째다. 얼마 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일회용 생리대는 안전하다고 발표하자 관련 기사의 댓글과 페이스북 등에서 생리대 유해성 문제를 제기한 여성단체를 고소고발해야 한다는 위협이 난무했다. 기업의 주가를 걱정하고 전문가의 권위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한껏 고양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은 물러서지 않고 “내 몸이 증거다”라고 외쳤지만, 과학을 불신하는 반지성주의적 태도라면서 특정 기업과의 연결을 조사해야 한다며 음모론을 펼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며칠 후 해당 수치는 입력 오류였고 제품 전부에서 1개 이상의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수치가 잘못 발표된 걸 시인하면서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생리대는 대부분 안전하다며 지나치게 우려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번 위해평가에 적용한 VOCs 독성참고치 기준은 국제표준에도 외부전문가기준에도 부족함이 없다며, 해당 물질의 잔류로 인해 나오는 문제는 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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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완정 / 출연 주윤발, 종초홍 / 제작연도 1987년
어릴 적엔 극장 가는 게 꽤나 큰 나들이였다. 비교적 변두리였던 우리 동네엔 내가 군대에 다녀올 때까지도 개봉관이 없었다. 동네에 있는 극장이라고 해봐야 미성년자 관람 영화와 불가 영화를 번갈아 틀어주던 동시상영관이 전부였고, 신문 광고에 ‘개봉박두’라고 박힌 신작 영화를 보려면 종로나 강남역으로 원정을 떠나야 했던 시절이다.
어딘지 음침하고 위험해 보이던 동시상영관은 그 무렵의 나와 내 친구들에겐 애당초 기피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대부분의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빌려서 보곤 했다. 학교에 매이고 용돈은 빤한 중고생에겐 개봉관 한번 다녀오는 게 지금처럼 그리 수월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러니 평소보다 하교 시간이 훨씬 빨랐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은, 우리 일당에겐 뜻밖의 영화 감상 주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험이 끝나면 정답을 맞혀본다는 핑계로 낮에 비는 친구 집에 모여 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빌린 영화를 틀곤
서형욱의 <가을날의 동화> 완성형의 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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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해 보이는 남자를 ‘변태’로 오인하는 해프닝. 우연과 오해를 로맨스의 포석으로 삼는 드라마들에서 자주 보았던 상황이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다루는 드라마에 놓이니 이물감이 굉장하다. 그리고 KBS2 <마녀의 법정>은 베테랑 검사 마이듬(정려원)과 초임 검사 여진욱(윤현민)의 첫 대면과 재회를 통해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가 몰리는 심리적 절벽을 분석하고, 어떻게 정보가 누락되고 판단이 왜곡되는지를 설명한다. 검사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중요한 정보를 놓칠 정도인데, 성범죄 피해의 당사자, 또 피해자가 아동인 경우는 어떨까? ‘여성아동범죄전담부’ 검사들은 물증이 없고 진술 증거가 대부분인 성범죄 사건에서 진실을 캐내야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만나는 피해자들의 기억과 진술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은 충돌한다. 이듬과 진욱의 일은 쉽지도 않고, 쉬워서도 안 된다.
<마녀의 법정>에는 “무죄를 받았으면 무고로 갚는다. 이게 성폭행
[TVIEW] <마녀의 법정> 무엇을 바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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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범죄도시> 싹쓸이파 놈들이 몰려옵니다!
[정훈이 만화] <범죄도시> 싹쓸이파 놈들이 몰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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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원하시겠어요.” 지난주 며칠 동안 ‘성추행 남배우’가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여배우A 사건’으로 알려진 영화계 내 성폭력 사건의 당사자였다. 15세 관람가의 휴먼 멜로 장르로 노출 신은 없을 것이라는 제안을 받고 모 영화에 출연했으나 촬영현장에서 부적절한 신체접촉까지 일어나면서 여배우A가 전치 2주에 해당하는 좌상 및 찰과상까지 입은 사건이었다. 여배우A는 남배우를 강제추행 치상죄로 고소했으나 법원은 피고인의 행위가 ‘업무로 인한 행위’에 해당하여 위법성이 조각된다 판결, 무죄를 선고했었다. 여배우A는 항소했고, 결국 남배우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집행유예 2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수강명령 40시간, 신상정보 등록)의 유죄로 판결됐다.
이후 배우 조덕제가 직접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 공공연하게 퍼져나가던 그 남배우의 실명 또한 알려지게 됐다.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는 결과로서 성행위 또는 성폭력과 관련된 연기를 할 때, 사전합의의 중요성을 보여준
[주성철 편집장] 영화계 내 성폭력 긴급포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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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설계할 때 사용하는 표현기법 중에 투시도와 엑소노메트릭이 있다. 투시도가 관찰자의 시점으로 건물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면, 엑소노메트릭은 시점을 벗어난 전체 체계를 보여주는 데 사용된다. 이 두 표현기법은 건축가가 어느 것을 주로 선호하느냐에 따라 설계의 결과물을 달라지게 하기도 한다. 엑소노메트릭이 기계처럼 각 요소 사이의 체계를 갖고 있는 건물을 만든다면 투시도는 좀더 개별적인 상황에 반응하는 건축을 나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둘은 표현기법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설계방법론이다.
나는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서 조금 의아했다. 개인과 역사가 조우하는 방식을 훌륭하게 조율하던 영화가 왜 생경한 자동차 추격장면을 포함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쉽게 상업적인 영화의 관습으로 이해하기에는 <택시운전사>는 지나치게 잘 만든 영화다.
<택시운전사>를 만드는 과정은 투시도보다는 엑소노메트릭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대부분의 창작 작업은 두
[영화와 건축] <택시운전사>의 자동차 추격 신과 검문소 장면의 표현방식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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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캐나다의 한 인디 밴드가 첫 내한공연을 연다. 디스트로이어라는 이름의 1인 밴드로 본거지 밴쿠버를 넘어 세계 곳곳에 마니아를 양산한 그룹이다. 프런트 맨이자 유일한 고정 구성원 댄 베하르는 내한 1년 전, 열 번째 스튜디오 앨범 《Poison Season》을 발표했다.
‘파괴자’라는 과격한 이름을 접했을 때는 하드록 아니면 헤비메탈 밴드이겠거니, 멋대로 추측하고서 찾아 듣지 않았다. 그야말로 섣부른 판단이었다. 2012년 언젠가, 우연히 <Chinatown>이란 곡을 들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기타 선율에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생각나는 몽환적인 가사와 목소리, 신시사이저와 전자음악이 있었다.
2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성실하게 디스코그래피를 채운 밴드의 가장 최신 음반은 올해 발매한 《Ken》이지만, 오늘 추천할 음반은 위에 언급한 곡이 있는 2011년 앨범《Kaputt》이다. 총 9곡 50분짜리 스튜디오 앨범에는 요즘 잘나가는 음악가들의 결과물처럼, 한 장르
[마감인간의 music] 디스트로이어 《Kaputt》, 빼놓을 곡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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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학생들은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한자로 ‘선생’은 ‘먼저 태어났다’는 뜻이지만, 대개 학생을 ‘가르치는’ 이를 일컫는다. ‘교수’는 아예 ‘가르쳐준다’는 뜻을 일차적으로 품고 있는 말이다. 선생과 교수는 공히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이를 가리키므로, 이 반대편에는 학생, 제자, 후학, 곧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지식을 배우는 이들이 위치해 있다. 이항대립으로서의 언어는 언제나 이 두 존재를 명확히 가른다.
과연 그럴까? 문창용 감독의 다큐멘터리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는 앙뚜와 우르갼이라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9살 난 앙뚜는 1400년 전 티베트 캄의 수도승이 환생한 ‘린포체’, 곧 살아 있는 부처이고, 70이 넘은 우르갼은 린포체인 앙뚜의 스승이자 그를 수발하는 노승이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앙뚜와 우르갼의 인도 생활을 그리다가, 후
‘우리’라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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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는 어떤 언론사의 사진기자다.
11년 전엔 사진을 공부하는 새내기 학생이었다. 2006년 5월 4일, 초대형 미군기지를 짓기 위해 먹구름처럼 몰려든 공권력이 평범한 농촌마을 대추리를 에워싸고 중장비를 동원해 학교와 집들을 부수며 진격해오던 ‘행정대집행의 날’, 그는 거기에 있었다. 사진 전공생이었지만 사진을 찍는 대신 친구들과 스크럼을 짠 채 어두운 교실 구석을 지켰다.
대추분교 정문이 박살나고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은 전쟁터가 되었다. 경찰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교실 안까지 진입하는 건 삽시간이었다. 불 꺼진 교실 안은 비명과 울음의 도가니였다. 학생들은 하나둘 팔이 꺾이고 목덜미를 붙들린 채 연행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이동했다. 학교 안과 밖, 마을 곳곳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서 어느 곳을 지켜(봐)야 할지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그날, 내가 가족과 잠시 살며 마을사진관을 꾸렸던 ‘우리집’도 바스라졌다. 대추리 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노순택의 사진의 털] 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