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정범>의 첫 장면은 기묘하다. 분명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각색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당한 절차 없이 그렇게까지 할 리 없다고 애써 우기고 싶은 마음 탓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건물의 옥상. 당장 허물어질 듯 조악한 망루. 거기에 퍼부어지는 물대포.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복잡하다. 이익과 이익이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조정과 협의가 요구된다. 하물며 공권력이 개입될 때에는 더 많은 절차와 조정의 과정이 따른다. 최소한 원칙은 그렇다.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이 주거생존권을 요구하며 남일당 건물 위에 망루를 설치한 건 사건 전날이었다. 하루만에 강경진압이 실행되었다. 신속하고 과격한 진압이었다. 어떤 대화도 협상도 없었다. 공권력의 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물대포가 쏟아졌고 화재가 발생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사건 수개월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공동정범> 한국 다큐멘터리영화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순간
-
“죽이기 아까운 눈빛을 하고 있구나.” <봉이 김선달>(2016)에서 사기꾼 김선달(유승호) 대신 견이(시우민)가 죽게 되는데, 그를 죽이는 절대 권력자 성대련(조재현)이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말한다. ‘엑소’ 시우민의 영화 데뷔작인 데다, 그 대사가 실제 시우민의 눈빛을 예리하게 묘사하는 것이기도 해서, 다음에 다른 영화에 출연한 시우민에 대해 쓰게 되면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그 대사를 메모해뒀다. 그런데 <봉이 김선달>에서 사기꾼 패의 막내를 꽤 귀엽게 잘 소화해낸 시우민의 차기작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안타깝다. 그래서 그냥 이 글에 써먹게 됐다.
오래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2006)의 유아인을 보면서도 ‘언젠가 꼭 글을 쓰게 될 신인’이라는 생각에, 영화에서 그가 마지막에 꼬마로부터 받아든 질문 “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라는 대사를 메모해뒀다. 그 대사를 인용할 일이 없던 차에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에서
[주성철 편집장] 내 수첩에 ‘저장’할 라이징스타
-
기구한 운명의 소년이 있다. 그는 일본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 젖도 떼기 전에 악당들이 일으킨 사고에 휘말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황량한 미국 서부의 황야에 버려진다. 다행히도 젖먹이는 사금광산의 노동자들에게 구해져 ‘이사무’란 이름을 얻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사금광산에 홍수가 밀어닥쳐 모두가 죽고 모든 것이 떠내려가버린다. 홍수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사무는 그와 평생의 악연을 맺게 될 만화 사상 최악의 캐릭터 윈 게이트 삼부자의 손에 거두어진다. 무법자라기보다는 살인마 집단에 가까운 윈 게이트 삼부자는 3살짜리 이사무를 온갖 학대를 하며 그를 살인도구로 키운다.
피할 수 없는 폭력의 굴레
정글에서 자라난 모글리에게는 따뜻한 모정을 지닌 늑대 어미가 있었고, 자신을 만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코주부 박사와 친구들의 보살핌이 있었던 아톰과 달리 이사무는 윈 게이트 삼부자의 학대와 폭력 그리고 리볼버밖에 없는 끔찍한 생활의
[뒷골목 만화방] <황야의 소년 이사무> 야마카와 소지 원작·가와사키 노부루 그림
-
슈퍼비의 첫 정규앨범이 발매됐다. Mnet 예능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의 모습과 타블로와의 사건 등으로 밉상으로 찍혔던 그는 이번 앨범 타이틀로 또 한번 찍힐(?) 준비를 마쳤다. 랩 전설이라고? 94년생 어린놈이 겸손하지가 못하네? 물론 나는 슈퍼비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나는 슈퍼비를 좋아한다.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에는 동세대 평균을 훨씬 웃도는 그의 랩 실력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힙합에 대한 그의 이해도 그리고 그의 태도 때문이다. 한국에서 어설픈 윤리주의와 강박적인 겸손함, 학습된 사고방식과 빈곤한 상상력으로 자주 오해하고 누명 씌우는 힙합의 멋과 힘에 대해 슈퍼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음악에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찬양가(Hip-Hop is Love)> <Rap Legend> <Fuxx School> 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예전에 발표한 노래 중에는 &l
[마감인간의 music] 슈퍼비 《Rap Legend》, 야망을 펼쳐라
-
-
페미니스트에게 세상이 자주 붙이는 딱지가 있다. ‘피해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강의를 하다보면 이런 질문도 곧잘 들어온다. “페미니즘을 알고는 싶은데 피해 의식만 잔뜩 생길까봐 겁이 나기도 해요. 피해 의식을 갖지 않고 페미니스트가 될 방법이 있나요?” 무리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둘러보는 시각을 갖게 되면 그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냥 지나쳤던 부분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이런 새로운 앎은 환희만 주지 않는다. 고통이 뒤따른다. “페미니스트가 되고 난 다음에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수가 없어요. 재미있게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짜증이 나고, 드라마나 영화도 보다보면 화가 나요. 친구와 가족들과도 점점 말이 안 통해서 조금씩 멀어지는데, 어떡하면 좋죠?”라며 울음에 가까운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나 역시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외부에서 읽고 들었던 이야기와 겹쳐서 몰입에 방해가 될 때가 있다. 영화관에서 흘러가는 대사와 별
피해 의식
-
텔레비전을 없앴다. 영리한 바보상자에게서 달아나고픈 마음을 품어왔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나는 텔레비전에 빠져들곤 했다. 탐사기획과 뉴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었다. 헌데 어느 날부턴가 그것들이 꼴보기 싫어졌다. 이명박의 계절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괜찮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괜찮은 목소리로 전해주던 세상의 희로애락이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농부를 고깃배에 태우는 식으로 기자와 PD를 쫓아내자 방송은 마치 사전의 뜻풀이를 시연하듯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다. 나팔수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침묵이었다. 거짓 저널리즘이 침묵의 토양 위에서 날개를 폈다.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시청료가 그 후원금처럼 여겨졌다. 때마침 텔레비전이 고장나자 미련 없이 버렸다. 그것은 MBC <뉴스데스크>와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과 작별을 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산하를 난자한 4대강 사업과 비리로 얼룩진 자원외교, 정
[노순택의 사진의 털] 나도 한때는 MBC를 보았다
-
감독 로버트 레드퍼드 / 출연 크레이그 셰퍼, 브래드 피트, 톰 스커릿, 브렌다 블레신, 에밀리 로이드 / 제작연도 1992년
어려서부터 물고기를 좋아했다. 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할 때에는 항상 물고기였고, 처음으로 읽은 한자는 ‘釣’(낚을 조)였다. 한자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는데 저 한자를 필사적으로 외운 이유는 외삼촌과 여행을 다닐 때 저 한자를 알고 있으면 유료 낚시터를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대나무 낚싯대에 연어알을 끼워 양식한 무지개 송어를 낚는 ‘손맛’ 낚시터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내 의지로 취미를 가질 수 있을 때 자연스레 낚시를 골랐다. 10대 때 어린 막냇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한강으로 버스를 타고가 루어낚시를 한 기억이 있다. 조악한 채비에 캐스팅을 할 줄도 몰랐지만 물가에 서서 보이지 않는 물고기를 기대하는 그 기분은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고 돈도 들고 시간도 드는 낚시를 지속하기 어려운 날들이 계속됐다.
정창욱의 <흐르는 강물처럼> 그게 브래드 피트야
-
※<고스트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숀 베이커 감독은 미국의 경제사회적 주변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발견하되, 고발하거나 동정하는 외부자의 관점을 멀리한다. 공간을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의 각본과 카메라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매일 들락거리는 장소가 드라마의 무대임을 잘 알고 있다. 매춘으로 생계를 잇는 트랜스우먼 단짝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알렉산드라(마이야 테일러)의 고단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담은 영화 <탠저린>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기적 같은 위안이 찾아오는 공간은, 플라스틱 일회용품으로 가득찬 도넛 가게와 클럽 화장실 그리고 썰렁한 코인 세탁소다. 별도의 세트 없이 다섯편의 저예산 장편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의 공력이 조용히 빛난다.
12/29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란 소리를 들었지만,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고스트 스토리>를 촬영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이모티콘
-
최근 프로그램들은 모두 부제가 일상화되어 있다. 이번에 다룰 프로그램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마이웨이 사부와의 동거동락 인생과외.’
SBS의 새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자, 예능 블루칩 이승기의 제대 후 첫 예능 복귀작인 <집사부일체>가 시작되었다. 육성재, 양세형, 이승기 그리고 예능 첫 나들이인 배우 이상윤이 함께 버스에 오른다. 각자의 승차지점에서 올라타고,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어김없이 예능 초보인 이상윤을 속이고, 동거동락할 사부의 집으로 향한다. 첫사부는 들국화의 전인권.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63년째 살고, 공연 중에는 누룽지와 스팸만 먹는 사부와 네 제자들이 얽혀 인생을 배운다. 또 어김없이 취침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끼워넣어진다.
에피소드 첫 번째의 절반 이상이 이승기의 복귀에 관련해 소비된다. 어눌한 전인권의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언행과 네 제자의 부적응은 꽤 오랜 시간을 지루하게 만든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몰입하기까지는 다
[TVIEW] <집사부일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
[정훈이 만화] <다운사이징> 레저랜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
[정훈이 만화] <다운사이징> 레저랜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
-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서울 상암동 본원에서는 김기영 감독 20주기 기념 전시 ‘하녀의 계단을 오르다’가 열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훈 기자가 다녀와서 쓴 이번호의 참관기(46~49쪽)를 참고하기 바라며, 전시는 1층 한국영화박물관에서 5월 19일까지 계속된다. 참관기에서 김성훈 기자가 김기영 감독 <파계>(1974)의 연출부였던 유지형 감독이 쓴 그와의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에서 인용한 것처럼 “김기영 감독은 괴물”이었다. 심지어 같은 책에서 유지형 감독에 따르면, <화녀>(1971)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기영 감독이 서울 주자동 골목에 2층 양옥을 구입했는데, 흉가여서 시세보다 싸게 구입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흉가에 사는 괴물 감독이라, 종종 그의 영화가 복층 구조의 집을 중요한 무대로 삼았기에 어딘가 묘하게 어울려 보인다. 실제 이번 전시에서 <하녀>(1960)의 배경인 2층 양옥에서 2층 공간인 동식(김진규)의 피아노방과
[주성철 편집장] ‘괴물’ 김기영 감독, 20주기 전시에 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