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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글과 사진을 버무려 귀한 지면을 어지럽혀왔다. 자그마치 10년이나. 226번째인이 원고를 끝으로 ‘사진의 털’ 연재를 마무리 짓는다. 시작할 땐 30대 후반 씩씩한 새 필진이었는데, 어느새 40대 후반 칙칙한 헌 필진이 되고 말았다. 내일부터는 그마저 아니다.
언젠가 고백했을 것이다. 나는 사진에 중독됐고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중독자의 눈으로 오늘의 만연한 사진풍조, 이 풍경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사진의 역사를 언급하기는커녕 장면의 현재에 대해 떠들기 급급했다. 절박한 호소, 피 말리는 긴박함, 목격자의 알량한 의무 따위에 매번 붙들렸다. 어느덧 나는 시사잡지에 어울릴 법한 원고를 영화잡지에 욱여넣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의 현실이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지 않은가 자위하면서. 부끄러운 일이다.
꼬박꼬박 한번도 ‘빵구’ 내지 않고 연재를 이어간 건 다행이었다. 나
[노순택의 사진의 털] 씨네리, 내겐 신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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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와이 순지 / 출연 나카야마 미호, 도요카와 에쓰시 / 제작연도 1995년
고백하자면, 나는 결정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영화’ 한편을 소개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어렵게 선택한 영화는, 하얀 설원에서 인연을 향해 안부 인사를 건네는 영화, <러브레터>다.
인연, 작게 소리내어보니 첫눈 오는 새벽 같은 아스라한 감정이 배어나온다. 아니, 그것보다는 오래된 세월이 묻어 있는 단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연’이라는 말에는 추상적이고 비과학적이고, 약간은 비밀스럽고 놀랍고 설레는 그런 비현실적인 감정들이 모인다. 우연과 운명의 사이 어디쯤 그것은 자리할 것이다. 우연이 자꾸 모여서 인연이 될 수도 있고, 온갖 우연들을 수집해서 감히 운명이라 이름 짓는 사이에 그것은 존재하기도 한다. 아무튼 인연이라는 말은 상당히 낭만적이다. 애석하게도 아직 나에게는 ‘인연’이라는 이름
양경애의 <러브레터> 낭만적인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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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마블 유니버스에 신대륙을 더했다. <블랙팬서>에서 인물의 동기는 액션의 핑계를 넘어 실제 세계의 이슈와 직결된다. 와칸다인의 패션과 문화도 어슷비슷한 마블 히어로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와칸다의 다섯 부족이 모여 티찰라(채드윅 보스먼)의 즉위를 결정하는 의식은 <블랙팬서>의 첫 정점이다. 얼핏 클리셰 같지만 의식은 합리적이고 의미심장하다. 후계자는 블랙팬서의 초능력을 빼고도 왕의 자격이 있는지 시험받고, 도전 기회는 모든 부족에 개방된다. 신성한 결투장의 경계를 짓는 것은 대자연, 폭포와 절벽이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성장한 부족 대표들은 특정인의 생사를 떠나, 장쾌한 노래와 춤으로 새 시대를 기념한다. <블랙팬서>는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흑인이기에” 멋진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02/07
라울 펙 감독의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블랙 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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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검색해본 우리나라의 해외 유학생 숫자는 지난해 기준 26만여명. 또한 국내로 유학 오는 외국인 유학생은 14만2천여명에 달한다. 이민과 단기 거주자 등을 합한다면 이 숫자는 더 늘어난다고 볼 수 있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숫자들을 늘어놓는가 하면 역시 이 프로그램 때문이다.
XtvN에서 매주 월요일 방송되고 있는,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자칭 ‘글로벌 미팅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제목에서, 부제에서 이미 프로그램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비록 번역이 어색해져버린 동명의 영화 타이틀을 빌려오긴 했지만 ‘Lost In Translation?’ 그 뜻이 명확히 전달되는 것은 일단 성공적이다. 2017년을 강타한 영화 <라라랜드>의 O.S.T <City of Stars>가 흘러나오면서 일본, 프랑스, 영국, 모로코 등에서 온 8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세번의 합숙과 두번
[TVIEW]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색다른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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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흥부> 흥이 많은 흥부와 놀기 좋아하는 놀부
[정훈이 만화] <흥부> 흥이 많은 흥부와 놀기 좋아하는 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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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주간지는 명절 연휴 때 발행을 쉬기 때문에, 명절 전에 미리 잡지를 만든다. 연휴 전에 만든 잡지가 연휴를 보낸 뒤, 그러니까 1주일 정도 뒤에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김성훈 기자가 이현주 감독 사건을 단독 보도했던 지난 1143호에서 “영화계 #미투(#MeToo) 운동을 이어가겠다”고 했던 에디토리얼은 정확하게는 지난주가 아닌 지지난주에 썼던 내용이다. 명절 연휴를 쉬는 주간지 입장에서는 ‘제발 큰 뉴스만 생기지 마라’ 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그 한주의 공백이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한데, 하필 이번 설 연휴는 그 어느 때보다 급박했다. 시인 고은과 연극 연출가 이윤택으로부터 시작한 뉴스는 배우 조민기를 지나, 이번호 <씨네21>이 단독 보도한 영화계 성희롱 사건까지(14쪽 김성훈 기자의 포커스, ‘조근현 감독 성희롱 사건 밀착 취재’ 참조) 씁쓸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며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이번 포커스 기사 또한 사실상 설 연휴 전에 완료한 기사였다.
[주성철 편집장] 조근현 감독 성희롱 사건 보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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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붓을 석유로 깨끗이 빨고, 팔레트에 남은 유화물감을 나이프로 모두 긁어모으면 만들어지는 색깔이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용했던 색들의 잔해가 한데 섞이면 검은색도 회색도 아닌 녹조류가 가득한 시궁창 물의 색깔과 비슷한 그린색의 흔적이 남은 거대한 어둠의 색깔이 만들어진다. 아깝지만 어디 쓸 곳이 없어 버려야 하는 칙칙한 색깔로 그린 만화가 있다.
이름과는 다른 현실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 위로 떠오르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어둠. 그 헤비한 어둠의 맨 아래에 눌러 꺼서 구부러진 담배꽁초가 그려져 있다. 꽁초 아래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글자. 그리고 그 아래에 ‘내가 바로 이시다 이시다’라는 소제목으로 <혼자를 기르는 법>의 출항이 시작된다. 서장(예고편)은 구약성경 첫장이 연상되는 “태초에 무한이 있었습니다”로 시작된다. 첫칸은 콧구멍처럼 생긴 무한대 기호를 손가락으로 ‘후비적’ 코를 파는 손가락. 다음 칸은 무한대 기호 속에서 나온
[뒷골목 만화방] <혼자를 기르는 법> 김정연 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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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으레 하는 일이 있다. 리스트 만들기다. 2017년을 다 지낸 후에도 나는 조촐한 리스트를 만들었다. ‘한해 동안 가장 즐겨들은 노래 10곡.’ 그중에는 호림의 노래도 있었다. 실제로 난 호림의 <TEMP-TON>을 즐겨듣는다. 잘 때도 듣고 커피를 내릴 때도 들었으며 사랑을 나눌 때도 들었다. 호림은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흑인음악 보컬리스트다. 처음 듣는 순간 ‘진짜’라는 걸 알았고 더는 가짜들에 눈물짓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재능도 다양하다. 호림이 최근 발표한 곡은 <MOVIN’>이다. 이 노래에서 호림은 마치 ‘디안젤로’처럼 ‘크루닝’(crooning)한다. 또 이 노래는 호림이 ‘힙합’의 팬임을 드러낸다. 드럼 비트, 케이알에스 원과 라킴의 익숙한 프레이즈(어떤 자연스런 한 단락의 멜로디 라인), 무엇보다 뮤직비디오가 그렇다. 뮤직비디오 속의 패션, 미장센, 카메라 기법, 그 안의 공기까지 모두 ‘멋’ 그 자체다. 릴우지버트나 릴야티
[마감인간의 music] 호림 <MOVIN’>, 힙합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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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우정이란 인간 사이의 공적 상호작용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것으로 찬미되었다. 훌륭한 정치공동체란 곧 좋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곳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우정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었다. 몽테뉴는 여자들은 영적 교감을 나누기에는 너무 얄팍하고, 그렇게 견고하고 질긴 관계의 압박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며 여자들 사이 우정의 깊이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기까지 한다.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메릴린 옐롬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점점 우정의 공적인 얼굴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사적 영역에서 고립되었던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 나오자마자 열렬하게 우정을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여자들이 더 우정에 헌신하며,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영화는 보통 빛나는 학창 시절을 회고하거나 대도시의 화려한 삶을 공유하는 이야기였
여자들의 우정을 그리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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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소동 / 출연 장국영, 왕조현 / 제작연도 1987년
1988 경상남도 거창_ 너무나도 작은 읍내였다. 그런 읍내에 차이밍량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에 나오는 딱 그런 극장이 있었다.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자주 혼자 극장에 가곤 했다. 대학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 극장에서 <천녀유혼>을 만났다. 난 이상하게도 귀신과 사람의 인연을 다루는 영화에 항상 끌린다. 그럴 때 귀신의 미련과 회한은 징하게 슬프다. <천녀유혼>을 보고 일주일을 야간자율학습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끙끙 앓았다. 그러고는 친구 신미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국영을 만나야겠어. 중국어과를 갈까 아니면 국어국문학과를 가서 <스크린> 기자를 할까? 장국영을 만나려면 어느 쪽이 더 쉽겠니?”
1991 경기도 안성_ 사진과는 안성에 있어 서울까지 스쿨버스를 타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자기 차로 서울에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차를 타고
니키 리의 <천녀유혼> 장국영이 죽어도 인생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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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당하는 아이를 유괴해 그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임시교사 이야기. 일본 <NTV>의 2010년작 <마더>에서 7살 소녀 레나(아시다 마나)는 천사처럼 환한 미소로 웃는 아이였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감추는 레나의 미소가 애달픈 한편으론, 드라마가 고난 속에서도 웃음과 밝은 성품을 잃지 않는 아이를 그리는 점이 힘겹기도 했다. 레나는 미소 짓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일본 사회가 여자아이에게 주입하는 메시지를 빨리 깨친 아이일지도 모르겠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tvN <마더>의 혜나(허율)는 원작의 레나보다 그늘이 짙다. 빤하게 보는 눈치가 어른들이 귀엽게 여기는 아이의 모습과 거리가 있고, 수첩에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놓은 목록도 차이가 있다. 레나가 적어놓은 음료 ‘크림소다’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이지만 혜나의 수첩 속에는 아이를 오래 방치했던 엄마가 아침에 마시다 남은 것을 건네주던 ‘카페라떼’가 적혀 있다.
이때 깨달았다.
[TVIEW] <마더> 다시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