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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영화비평으로 출발했지만 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등 다양한 문필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문학적 야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내 성장기에서 영화와 함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쓰기였다. 어렸을 때 나는 주위환경을 내가 전혀 제어할 수 없다는 데서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아홉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이 무력감이 조금 가시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나마 말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열다섯살 땐 처음으로 헤밍웨이를 읽었는데 그의 작품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다시 써보는 연습을 했다. 요새 말로 하자면 ‘해체론적 실천’이라고 할 만한 것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은 지금도 내 글쓰기에서 중요한 밑천으로 작용한다.당신은 50년 넘게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영어로 글을 쓰고 있다. 어떤 점에서 당신은 20세기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자발적 망명자’들의 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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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와 함께 스크린으로 금의환향한 건 오스틴 파워만이 아니다. 오스틴에 대적하는 닥터 이블, 그의 ‘사악함이 1/8로 농축된’ 클론 미니 미의 못 말리는 짝패도 돌아왔다. <오스틴 파워>에서 덩치만 다른 쌍둥이처럼 새끼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댄 채 악동 같은 웃음을 흘리던 그들을 기억하는지. 익히 탄로난(?) 대로 닥터 이블의 실체가 오스틴, 팻 배스타드, 골드멤버와 동일 배우인 마이크 마이어스라면, ‘미니 미’의 애칭과 침묵 뒤에 숨은 배우는 바로 버네 트로이어다. <오스틴 파워> 시리즈의 2, 3편으로 덩치에 반비례하는 인기와 성공을 거머쥔 그는 실제 지극히 아담한 몸집의 연기자. 80cm가 약간 넘는 신장 때문에 앳되어 보이지만, 내년 1월이면 만 서른넷이 된다.
미시건의 작은 마을 센터빌에서 자란 그가 고교 때부터 막연히 꿈꾸던 영화계에 입성한 것은, 전화회사에 다니던 1993년. 친구의 소개로 <빙크의 베이비 데이 아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의 미니 미,버네 트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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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겨울 연가> 같아요. 그때 정말 추웠거든요.” 초겨울 쌀쌀한 날씨, 낙엽이 수북이 쌓인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최지우는 소녀 같은 목소리로 호호거렸다. 3년 만에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스크린에 돌아올 참이지만, 무심결에 <겨울 연가> 얘기를 꺼내는 그녀에게선 아직 ‘텔레비전’ 냄새가 물씬 났다. <신귀공자>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그동안 1년에 한편 정도씩 꾸준히 드라마를 하며 최지우는 ‘예쁜 탤런트’로 착실히 입지를 다져왔다. 그때, “드라마 할 때는 영화 시나리오 볼 시간도 없었다”.
최지우를 다시 스크린으로 데려온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그런데 최지우를 그냥 ‘예쁜 탤런트’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듯하다. 지금까지의 최지우가 곱게곱게 단장된 모습이었다면,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그녀는 확실히 보기와 다르게 터프해진다. 대통령의 말 안 듣는 딸 영희를 가르치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돌아온 배우 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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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전에서 ‘고전’의 뜻을 찾아보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통독하지 않은 책”이라고 풀이돼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보드웰 그리고 크리스틴 톰슨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지 않다면 당신의 책장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 예술>(Film Art)이나 <세계영화사>(Film History)라는 제목의 묵직한 책이, 한때 결의에 부풀어 출석했던 학교나 문화센터의 영화학 개론 수업의 추억을 뜨끔하게 일깨워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지런하고 열심인 서울의 영화학도들은 지난 11월12일 오후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 재직 중인 보드웰 교수는 한국 영화학회의 초청으로 동반자 크리스틴 톰슨 교수와 나란히 내한해 11월12일 동국대에서 최근 영화학의 동향을 간추리고 오랫동안 그가 집중해온 ‘역사적 영화 시학’(Historical Poetics of cinema)을 유효한 방법
내한한 미국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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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름과 똑같이 생길 수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대니의 질투>(Man in the Moon, 1991)라는 아담한 성장영화였다-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톡 튀어나온 짱구 이마와 꼭꼭 당겨 묶은 24K의 금발, 호기심 많은 눈, 하고 싶은 말들이 소복이 담긴 꽃삽 같은 턱. 영화 속에서 유난히도 달을 많이 바라보던 소녀는 반짝이는 은제 티스푼 위에 올라앉은 레몬 아이스크림처럼 입 안을 굴러다니는 리즈 위더스푼이라는 이름과 완벽하게 하나였다. 포니 테일의 소녀는 이내 쑥쑥 자라 자기보다 더 예쁜 남편(라이언 필립)을 얻고 아기 엄마가 되었지만, 리즈 위더스푼은 여전히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야무지고 상큼하며, 똑 부러진 몸짓으로 자기를 주목하라 보챈다. 딸 아바를 세상에 내보낸 것은 그동안 위더스푼이 해낸 많은 큰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녀는 <일렉션> <플레전트 빌>처럼 칭찬받는 영화에서 당당히
<스위트 알라바마>의 리즈 위더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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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라는 직업은 가끔씩 얼굴에 철판을 뒤집어써야 하는 일이다. 장염과 감기몸살을 동시에 얻어, 사흘 동안 죽과 링거주사약으로 연명했다는 장동건은 ‘톡’ 치면 ‘폭’ 쓰러질 듯 핼쑥했다. 이런 환자와의 인터뷰를 고집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해안선>의 부산영화제 개막 상영을 앞두고, 우리는 일찌감치 장동건을 인터뷰하기로 했었다. 그날 장동건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비보’를 들었고, 이른 쾌유를 기원하며 며칠 뒤로 약속을 미뤘다가, 또 다시 부산영화제 개막 당일로 옮겨 잡았다. 그렇지만 상황은 나아 보이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장동건은 지치고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성사되야만 했다. 사람 만나고 기사 쓰는 것이 일인 기자로선, <해안선>의 홍보 카피 그대로, 데스크가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죄책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장동건은 공연히 아픈 게 아닌 것 같았다. 촬영을 끝낸 것이 꽤 오래 전
<해안선>으로 돌아온 장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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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신(40)은 평단보다 관객이 반긴 감독이다. 데뷔작 <자카르타>가 평단의 비판, 내지 유보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크게 히트했고 두 번째 영화 <몽정기>도 흥행예감이 좋다. 영상이나 이야기의 세부장치가 거칠어도 그냥 밀고가는 그의 연출은 아직은 ‘웰 메이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대중이 감응할 만한 요소들은, 그게 상투적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방점을 찍는다. <몽정기>는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해 몸이 먼저 아우성치던 ‘몽정기’, 내지 ‘발정기’의 추억을 환기시키는 영화다. 그 방식은 익숙한 것이지만, 자칫 외부와 충돌하기 쉬운 소년들의 불안한 성욕을 보기 편하게 영화 속에 녹여내는 모습이 밉지 않다.<몽정기>까지 히트한다면 정 감독은 몇 안 되는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설 게 분명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간첩 리철진> <달마야 놀자>를 제작한 씨네월드가 2년 가까이 야심차게 준비해온 역사코미디 <황산벌>의
소년들의 성적호기심 그린 <몽정기>감독 정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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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로페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타블로이드 신문기사보다 더 믿기 힘들다. “나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마(Ma)라고 불러요. 그들은 내가 정말 엄마 같은 타입이라고 말하죠.” “난 약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에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인 분위기가 마치 서커스 링처럼 날 둘러싸고 있죠. 보수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어요.” “술, 담배는 시작도 안 했어요. 엄만 항상 술과 담배가 몸에 나쁘다고 말했거든요. 마약은 물론이고.” 그런데도 믿을 수밖에 없다. 로페즈와 어느 클럽에 동행했던 <롤링스톤> 기자는 그녀가 알코올로 달아오른 사람들과 뒤섞여 열기를 발산하면서도 밤새 단 한번도 술병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어쩌면 로페즈의 마력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고대의 모신(母神)처럼 당당한 몸집을 가진 로페즈. 생명의 기운을 한 모금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만 쏟아내는 그녀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희생양으로 전락하지
당당한 여신, <이너프>의 제니퍼 로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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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의 눈은 입을 배신한다. “미친… 병신….” 툭툭 욕도 잘 내뱉는데다, 어지간해서 닭살돋는 칭찬도 잘 안 하는 설경구의 입. 그러나 그런 입에서 10c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눈에 이르면 그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오아시스>에서 소아마비 장애인 연기를 하겠다고 나선 문소리를 향해 “이 바보 같은 게 미쳤다고 몸 뒤틀고 그런 걸 하냐”며 핀잔을 줄 때도, 그의 눈만큼은 힘들고 고된 연기를 앞둔 후배를 향한 따뜻하고 애틋한 심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설경구는 심술맞은 말 속에 자신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이내 순수한 속을 들켜버리고 마는 열세살 사춘기 소년 같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 동기로 처음 만났던 김상진 감독과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설경구가 2학년 때 군대를 가버렸으니 친해질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 김 감독은 “메이저 흥행감독”으로 자신은 “마이너 배우”로 살아갔으니 영영 못 만날 팔자였는지도 모른다.
<광복절 특사>의 배우 [2] - 설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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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원의 손은 얼굴을 배반한다. 끝이 뭉툭하게 마무리지어진 무심한 그의 손가락 위에는 짧고 작은 손톱이 씨눈처럼 박혀 있다. 짙은 눈썹 아래 자리잡은 강렬한 이목구비에 비하면, 그는 참 덤덤하고 꾸밈없는 손을 가졌다. 패션쇼 무대에서 내려와 처음 그가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차승원이란 배우의 조각 같은 얼굴과 몸에 눈길을 빼앗긴 채, 차마 그의 손을 내려다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그 소박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휴, 왜들 이러시나, 나 그런 눈으로 볼 사람이 아니에요.”
대학교 1학년 때 결혼해 이미 초등학교에 다닐 만큼 장성한 아들이 있는 유부남에, 설경구의 표현대로, “받아치는 데 있어서는 대한민국 1인자”라는 순발력 있는 말솜씨를 선보이며 서서히 얼굴을 알려나간 그는 여성 판타지의 제물로 바쳐지고, 이내 휘발되어버리는 여느 모델 출신의 남자배우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초반 몇몇 드라마와 영화에선 ‘잘생기고 돈 많은 왕자님’
<광복절 특사>의 배우 [1] - 차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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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년 전인데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1999년 <쉬리>가 일본에서 전국 100만명을 돌파한 사건. 한국영화는 그때 일본에서 뭔가 거대한 시장을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쉬리> 이후 많은 영화들이 100만달러 넘는 가격으로 일본에 팔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국에서 수많은 일본영화가 극장을 잡지 못해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만이 이름값을 했을 뿐 일본에서 한국영화는 여전히 마이너리티에 머물고 있다. <쉬리>의 성공은 단지 운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한국영화의 매력이 이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지난 10월29일 ‘한민족 문화공동체대회’ 참가차 방문한 일본의 영화사 씨네콰논 대표 이봉우(43)씨를 만난 것은 그런 궁금증 때문이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를 배급한 그는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그는
<쉬리> 등 일본 배급한 씨네콰논 대표 이봉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