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제작기
최진성 감독 2년여 작업 거쳐 공개, 첫 보도 대학생·기자가 주요 캐릭터, 관객 눈 바라보며 경험담 털어놔, ‘바로 당신의 이야기’ 메시지 시도, 다큐로 글로벌 순위 17위 ‘이례적’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의 최진성 감독(왼쪽부터)과 영화에 출연한 <한겨레> 오연서·김완 기자가 2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른바 엔(n)번방 사건이 2019년 11월 <한겨레>의 집중 보도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해당 보도를 했던 김완 <한겨레> 기자에게 사건을 극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영화사들의 자문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 기자는 “극영화로 만드는 건 적절치 않다. (피의자) 재판이 아직 안 끝났고, 무엇보다 피해자가 재연 장면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랬던 김 기자가 지난 18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에 출연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최진성 감독이 넷플릭스와 다큐 제작을 논의한 건 2020년 초. “넷플릭스에 범죄 다큐 카테고리가 있어요. 그걸 만들기로 하고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엔번방 사건을 놓고 고민했죠. 그러다 제가 엔번방을 하자고 했어요. 기존에 없던 비대면 사이버 범죄, 모방이 쉽고 피해자 고통이 영구적인 사건을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전세계에 알리고 경각심을 주는 게 의미 있겠다 싶었거든요.” 2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최 감독이 말했다.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최 감독은 김 기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실 둘은 20년 전부터 알던 사이. 김 기자가 2002년 서울 충무로 영상미디어센터 ‘활력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 최 감독과 허물없이 어울렸던 것이다. “우리 기사가 나가고 처음 연락해온 곳이 대만 매체였어요. 자기네도 비슷한 범죄가 있다더군요. 이런 범죄가 글로벌하게 퍼지고 있구나, 하던 차에 전세계에 공개되는 넷플릭스라 해서 솔깃했어요. 게다가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였고요. 또 내가 아는 최 감독이라면 정치적 올바름을 견지할 거란 믿음도 있었고요.”(김 기자)
김 기자는 출연을 승낙하면서 “영화 작업에 반드시 여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최 감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조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의 70%를 여성으로 채웠다. “영화 속 음악, (피해자를 표현한) 애니메이션 등도 모두 여성이 만들었어요. 남자가 하면 의도와 달리 엉뚱하게 표현될 수도 있을 거란 우려 때문이었죠.”(최 감독) 피해자 사진 등의 사용도 최소화했으며, 필요한 경우엔 원본 대신 새로 연출해 만든 걸 뿌옇게 처리해 사용했다.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의 최진성 감독(왼쪽부터)과 영화에 출연한 <한겨레> 오연서·김완 기자가 2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최 감독은 다큐뿐 아니라 극영화 연출 경험도 많다. 그는 “다큐라도 극영화처럼 재밌고 몰입감 있게 만들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저널리스트와 경찰이 힘을 모아 범죄자를 일망타진하는 사이버 범죄 추적극 얼개를 취하면 이야기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타당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대학생 기자 ‘추적단 불꽃’의 ‘불’(활동명. 현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과 ‘단’(활동명), 기성 언론으로서 처음 대대적으로 보도한 <한겨레>의 김완·오연서 기자를 주요 캐릭터로 만들어 이야기를 끌어가도록 한 까닭이다.
이들은 극영화 촬영장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세트장으로 안내됐다. 최 감독은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별도의 세트장을 지었다. 김완·오연서 기자는 종이를 잔뜩 붙인 보드판과 책장을 뒤로하고 서류뭉치가 산처럼 쌓인 책상에 앉았다. 명암 대비가 강한 조명은 누아르 영화를 방불케 했다. 최 감독은 “관객에게 범죄 추적극으로 보이려면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봤다. 각 인물에 맞는 세트장, 조명 등을 통해 추적자 캐릭터를 구축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를 연출한 최진성 감독. 강창광 선임기자
두 기자는 취재 경험담을 차분히 털어놓았다. 특이한 건 보통의 인터뷰 장면과 달리 인물이 마치 관객 눈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듯한 구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각 기자가 들어선 공간에서 그들은 철저히 혼자였다. 카메라도 스태프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오로지 프롬프터만 있었다. 거기에 최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프롬프터 속 최 감독이 질문하면 그를 보며 답했다. “사람도 소음도 없는 진공상태 같은 공간에서 나 혼자 떠들었어요. 어느 순간 뭐에 홀린 듯 술술 쏟아내게 되더라고요. 저도 몰랐던 제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울컥한 순간도 있었죠.” 오 기자가 그때를 떠올렸다. 최 감독은 “인테로트론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물이 관객의 눈을 보며 대화하는 듯한 효과를 냈다. 보는 이들에게 ‘당신은 구경꾼이 아니다. 여자든 남자든, 바로 당신의 이야기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에 출연한 <한겨레> 오연서 기자. 강창광 선임기자
두 기자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하는 효과를 얻었다고 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제가 취재에 임했던 태도의 변화가 생생하게 담겼더라고요. 처음엔 기자 초년생으로서 선배가 시키니까 했는데, 점차 피해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됐고, 그러면서도 기자니까 냉철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힘들어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과정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힐링이 되더라고요.”(오 기자) “저는 취재하면서는 힘든지 몰랐는데, 피의자 ‘박사’가 잡히고 나니 오히려 힘들었어요. 너무 어린 나이라 징역 몇년 살고 나와서 내 가족에게 해코지하는 건 아닌지, 길에서 20대만 보면 박사방에 있던 한패가 아닌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병원 상담 치료도 받았죠. 이번에 내 얘기를 쏟아내고 벅찬 감정을 느끼면서 많이 편안해졌어요.”(김 기자)
영화는 ‘박사’ 조주빈과 엔번방을 처음 만든 ‘갓갓’ 문형욱이 검거돼 각각 징역 42년형과 34년형을 받기까지를 담았다. 추적단 불꽃과 <한겨레> 보도, 시사 프로그램 <스포트라이트>(JTBC)와 <궁금한 이야기 와이(Y)>(SBS)의 후속보도, 경찰 수사 과정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언론, 경찰뿐 아니라 여성단체, 심지어 피의자 변호인들까지 모두 협조해줬어요. 우연치 않게 지옥도를 만나고 소용돌이에 말려든 이들의 고군분투를 연결해보니 결국 보이지 않는 연대를 통해 범인을 잡은 거였어요. 영화에 나온 24명만이 아니라 그 뒤의 수없이 많은 분들이 사건을 해결한 셈이죠. 그 자체가 ‘드라마’이자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최 감독)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에 출연한 <한겨레> 김완 기자. 강창광 선임기자
주요 피의자를 붙잡았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근 <한겨레> 보도를 보면, ‘일반 가담자’ 378명은 1심 재판에서 평균적으로 벌금 653만원, 징역 13.2개월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들이 261명(69.1%)으로 가장 많았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600여개를 내려받아 소지한 20대가 무죄를 선고받은 일도 있었다. 김 기자는 “디지털성범죄는 (제작·유포한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것과 (내려받아 본 사람까지) 모두를 처벌하는 게 필요한데, 후자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며 답답해했다. 오 기자도 “수요나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범죄가 계속된다. 소지만 해도 제작한 사람만큼이나 처벌해야 하는데, 아직 법이 따라주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25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을 보면, <사이버 지옥>은 넷플릭스 영화 글로벌 17위에 올랐다. 한국, 홍콩, 베트남, 대만, 일본 등 아시아 9개 나라에서 10위권에 들었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로선 이례적인 성과다. “연출자로서 영화적 성취도 중요하고, 재미와 의미를 평가해주는 것도 좋지만, 디지털성범죄의 위험성이 전세계에 알려진다면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교육 자료로 쓰였으면 합니다. 등급 때문에 청소년에게 보여줄 수 없어 아쉽지만, 갓 성인이 됐을 때 남자든 여자든 꼭 봤으면 합니다.”(최 감독)
한겨레 서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