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오승훈의 이 칸 저 칸] 박찬욱·탕웨이·박해일 인터뷰
박찬욱 신작 ‘헤어질 결심’, 칸 공개작 12편 중 평점 1위, 탕웨이 “박 감독님은 제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신 분”, 박해일 “박 감독님 전화 받고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맨 왼쪽)과 주연 탕웨이(가운데)·박해일이 칸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박찬욱 감독의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헤어질 결심>을 둘러싼 칸 현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24일 오후(현지시각) 영국 영화 매체 <스크린 데일리>가 종합한 <타임> <가디언> <르몽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디 차이트> 등 주요 외신 10개 매체의 평점 순위에서, <헤어질 결심>이 평점 3.2점으로 이날까지 공개된 경쟁작 12편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R.M.N'과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이 평점 2.5점으로 공동 2위에 올랐다. 오는 26일 공개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등이 반영되지 않은 결과지만, 당장은 <헤어질 결심>의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이 작지 않은 편이다.
이날 오전 공식 기자회견과 오후 라운드 인터뷰에서 만난 박 감독과 박해일·탕웨이 두 주연배우는 이런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듯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수상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박 감독은 유머를 섞어가며 소탈한 답변을 내놨다. 박 감독의 말은 받아쓰면 곧바로 문장이 될 정도로 논리정연했다. 박해일은 취재진의 질문에 귀를 가까이 대며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의 의미에 대해 성심껏 답했다. 탕웨이는 한국어 연기의 어려움을 농담 섞어가며 재치있게 답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서로 무척 가까워진 이들의 재회 장소가 칸이라는 사실은, 이들에게 분명 복인 듯했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마음 상태는 이들과는 무관해 보였다.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이 칸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벌어진 변사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이 변사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고전 형사물의 드라마적 기법을 바탕으로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의 내밀한 연정을 폭력과 섹스 같은 자극적 장면 없이 담백하게 그려낸 새로운 멜로 드라마다. 영화 <아가씨>(2016) 이후 6년 만에 칸영화제 경쟁 부문 후보로 지명된 박 감독은, 영화 <올드보이>(2004), <박쥐>(2009), <아가씨>에 이어 네 번째로 칸의 초청을 받았다.
박 감독은 전날 이뤄진 칸 공식 상영에 대한 소감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한테 와서 인사하고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다 좋은 얘기만 하지 않겠어요?(웃음) 그런 줄 알고 살려고 해요.(웃음) 물론 영화 보는 동안에 관객들이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나는 좀 웃기려고 했는데도 ‘이거 웃어도 되는 장면인지 뭔지 잘 모르겠어’ 하더라고요. 어제 파티에 모인 사람들한테 그 얘기를 다 했더니 사람들이 ‘아, 난 정말 자주 웃고 싶었는데 눈치 보느라고 못 웃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웃음)”
전작과 의도적 차별점을 두려 한 것이냐는 질문에는 시작과 나중이 달랐다고 밝혔다. “시작할 때는 좀 의식하죠. 분명히 ‘전 영화들과 달라야겠다’는 식으로. 그렇지만 각본 쓰는 초기 단계쯤 오면 이미 이런 생각 또한 익숙해져 있고 그다음에는 이 스토리에 어울리는 형식이 뭔지 하는 그 고민만 남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전작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은 안 하게 되죠.”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연 탕웨이가 칸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전작과 다른 형식미를 보여준 <헤어질 결심>의 특징에 대해서는 “말초신경 자극하는 전작들처럼 그런 감각적인 면이 아주 없진 않지만 막 들이대기보다는 좀 관객 스스로가 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며 “너무 들이대면 자꾸 뒤로 물러나게 되는데 조금 보여주면 또 앞으로 다가오게 되지 않냐”고 했다. 어른들의 멜로를 표방한 <헤어질 결심>은, 성인 멜로물과는 거리가 멀다. 육체적 연애보다 언어적·정서적 연애에 집중한 것. 여기서 어른은 ‘성인’이라기보다 ‘어른스러움’이다. “중요한 게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죠. 신체 접촉조차도 전혀 없는데 말할 때 뭔가 좀 도발하는 눈빛, 그런 자극을 하는 한마디, 이런 것들이 ‘심쿵’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들, 작은 미소 이런 것으로 가슴이 더 크게 내려앉는 그런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날 오전 이뤄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박 감독은 “(폭력과 섹스신이) 있으면 그게 왜 있냐고 하고 없으면 왜 없냐고 하더라”며 억울해했다. “어제도 여러 나라 배급사 분들을 만나서 얘기하는 중에 ‘<헤어질 결심>을 박찬욱 영화의 새로운 진화라고 홍보해도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건 좀 위험하다’고 했어요. 진화된 폭력과 정사신인 줄로 오해하면 어떡하냐는 거죠.(웃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처음 기획할 때 어른을 위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엄청난 정사신이 나오냐’고 하더라”며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했고 ‘반대로 가야겠다’ 생각했다”고 밝혔다.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연 박해일이 칸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극 중 변사자의 아내 서래 역을 연기한 탕웨이는 박 감독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피력했다. “어제저녁 첫 상영회가 끝나고 박 감독님께 ‘제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신 분’이라고 말했어요. 이 문장 하나로 박 감독님과 함께 일한 감상을 요약할 수 있겠네요.” 이어 그는 “서래는 저와 (실제로) 아주 가까운 인물이고, 원래 미묘한 감정을 심장 바깥으로 내보이는 인물을 아주 좋아한다”며 “박 감독님이 저에게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영역을 줬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어로 대부분의 연기를 하는 만큼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그는 “촬영 내내 너무나 기뻤지만, 언어 때문에 실질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며 “특히 첫 촬영 때는 저와 박 감독님, 박해일씨 세 사람 모두 번역기를 준비해 왔더라”고 말했다. 한국어 문법부터 말하기, 듣기 등을 익히기 위해 교습까지 받았다는 그는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했다”며 겸손해했다.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는 엘리트 형사 해준을 연기한 박해일은 “박 감독님을 만났을 때 30분간 쉬지 않고 작품 이야기를 해주셨다”며 “그때 든 생각은 ‘내 인생에서 이런 역할이 있었나’였다”고 했다. “연기하면서 정답이 뭘까, 고민하고 힘겨웠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아를 내려놓으니까 박 감독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잘 들리더라고요. 덕분에 집중도 더 잘되고 결과물도 나왔죠. 마법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게 박찬욱의 마법이 아닌가 생각해요.”
24일 오전(현지시각) 칸국제영화제 ‘팔레 데 페스티벌’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헤어질 결심> 공식 기자회견에 배우 탕웨이(왼쪽 두번째부터), 박찬욱 감독, 박해일, 정서경 작가(왼쪽 두번째부터)가 참석했다. 칸/오승훈 기자
그에게 캐스팅을 제안하려 전화를 건 박 감독이 “우리 좀 만날까?”라고 말하자, 박해일은 몇초 동안 뜸을 들이더니 “감독님, 제가 뭔 잘못을 했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상하게 절 캐스팅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어요. 전화를 받았던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도 들었고요. 하하.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감독님이 ‘해일씨, 나랑 작품 하나 합시다’라고 하셨어요. 행운 같은 기회를 얻게 된 거죠.”
박해일이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칸영화제가 다들 그렇게 좋은 데라고 하니까 ‘그렇게 좋은 덴가’ 싶었다”며 “기회가 된다면 나도 꼭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에 오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오전 열린 공식 기자회견장에는 120여명의 취재기자가 몰려 <헤어질 결심>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입증했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프랑스, 미국 등 각국 기자들은 박 감독의 작품 세계와 <헤어질 결심>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졌고, 박 감독은 솔직한 답변과 위트로 분위기를 띄웠다. 보통 프랑스어와 영어 통역만 이뤄지던 기자회견장에서 이례적으로 한국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사인을 요청하는 각국 기자들이 달려들면서 박 감독과 탕웨이·박해일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한겨레 오승훈 기자